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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6

오늘의 쉼터 2015. 6. 13. 13:49

그녀의 시간표 36 

 

 

 

 

 

징글벨 징글벨 징그으르벨…

벨소리가 한참을 울리도록 나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제 내가 어떤 꿈을 꾸었더라?

나는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명태씨… 만나고 싶어요.”

 

이런 기막힌 일이! 정녕 꿈이 아닌 현실이란 말인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를 했건만 도통 받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걸어와서는 스스럼없이 만나기를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중하며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이며 팀장이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채업자예요.”

 

팀장에게 양해를 구한 뒤 복도를 따라 몇 발짝 걸어갔다.

그사이 그녀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약속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꼬리 달라붙지 않도록 조심해주셨으면 해요.”

누군가 나를 미행할 수도 있단 말인가?

하긴 그녀와 나를 지켜보는 눈은 수없이 많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더구나 쌍둥이에게 협박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예의상 나라는 인간이 허튼수작이나 부리는 인간이 아님을 보여줄 제스처도 필요했다.

 

서둘러 퇴근을 하는데,

부리나케 쫓아 나온 팀장이 어쩐 일로 술 한잔 사겠다며 붙잡고 늘어졌다.

팀장의 간절한 눈빛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지금은 저승사자가 면담을 요청해도 거부할 판이었다.

나는 사채업자와 이미 한잔하기로 약속했다고 둘러대곤 쏜살같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그녀의 권유에 따라 약속한 장소로 곧장 가지 않고 여기저기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부러 막 출발한 버스를 세워 올라탔는가 하면, 불현듯 뛰어나가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전철로, 다시 버스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피해 다녔다.

그러다 한순간, 낯선 풍경이었고 이곳이 어디쯤인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젠장, 언제부터 전철이 천안까지 간 거야? 흘러도 너무 많이 흘렀다.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렸다.

다시 전철을 탔고, 내리며 시간을 확인했는데, 다행히 약속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여유를 되찾았다.

전철 층계참을 벗어나 보도블록을 밟으며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엎어져 냄새가 진동하는 음식물 쓰레기통,

일찌감치 게워놓은 누군가의 토악질물, 내 눈에는 아름다운 오브제로 보였다.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가로등을 향해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몸이 바빴던 만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했다.

보고 싶었다.

그녀의 흘러내린 귀밑머리에 후우 입바람을 불어주고 싶었다.

아아, 그녀의 어깨에 기댈 수만 있다면…

홍지연, 조금만 기다려라!

파이팅하듯 한손을 번쩍 밤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불현듯 내 어깨를 잡아챘다.

 

“마명태! 너, 여기서 왜 얼쩡거리고 있어?”

 

이 목소리는…? 팀장과 그의 멤버였다.

미행자에게 과다하게 신경 쓴 탓에 미처 이곳이 회사 근처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사코 뿌리쳤으나 소용없었다.

올가미에 걸린 슬픈 짐승처럼 고삐를 붙잡힌 망아지처럼 그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저긴데… 바로 저긴데…”

 

거기서, 그 누구도 아닌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애달픈 절규를 엉뚱하게도 팀장이 받아주었다.

 

“맞아, 바로 저기야. 오늘은 내가 사, 내가 산다고!”

 

핑그르르, 찔끔 눈물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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