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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4

오늘의 쉼터 2015. 6. 13. 13:31

그녀의 시간표 34 

 

 

 

 

 

리칼이 빳빳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주마등처럼 악몽 같았던 군복무시절의 한 토막 경험이 눈앞을 스쳤다.

사단장배축구대회였는데, 대대 대표로 나갔던 녀석들이 전패로 예선탈락하고 말았다.

분노한 대대장은 패배 요인을 찾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감독을 맡았던 작전과장은 선수들 모두가 흡연자라는 사실에 주목,

결정적 패배 요인이었다고 보고했다.

대대장과 작전과장은 비흡연자였다.

당장 ‘체력은 곧 전투력, 금연으로 승리하자’라는 대대장의 일장 훈시가 있었고,

이어 ‘금연 대대’ 선포를 선언했다.

 

나는 전역을 무려 넉 달이나 남겨두고 있었다.

골초인 나로선 도저히 동참이 불가능했다.

이곳저곳 전전하며 몰래 담배를 피우기를 한 달째,

결국 누군가의 예리한 시선에 나의 긴 꼬리가 포착되고 말았다.

호출을 받고 대대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코뿔소처럼 달려온 대대장이

“이 새끼, 죽고 싶어서 안달하는 거야. 그렇지?”하고

으름장을 놓으며 워커발로 내 쪼인트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 사건으로 보름간 침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될 것 같은 낌새였다.

 

“진정하시고 말로… 말씀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면서도 애처롭고 간절한 눈빛으로 쌍둥이에게 호소했다.

 

“뭔가 오해를 하셨는데, 제 딴에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만…

아시다시피 제 마음은 이미 홍대리를 떠나 멀리 알래스카로 이민 간 지 오래됐습니다.

그런 제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두 분 형님의 연애전선에 연막탄을 터뜨리겠습니까?”

 

“뭐, 연애전선? 우리가 홍대리를 사랑한다 이거야?”

 

“설마… 아닌가요?”

 

“우린 홍대리에게 관심 없어. 그 여자는 따로…”

 

다른 쌍둥이 하나가 툭 손으로 녀석을 쳤다.

녀석이 헛기침을 하더니 곧 뒷말을 이었다.

 

“비명횡사 당하지 않으려면 앞으로 주둥이 잘 간수해.

오늘 우리가 한 말, 가슴에 문신으로 새겨두라고. 그만 가봐.”

 

부리나케 꽁무니를 빼며 맹세했다.

두 번 다시 찾지 않으리라. 내게 남자휴게실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상이치가 원래 그렇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건 곧 어딘가에 천국이 존재한다는 반증.

휴게실을 빠져나와 씩씩거리며 복도를 걸어가는데 향긋한 내음이 살랑살랑 코끝에 스며들었다.

내음에 이끌려 고개를 쳐들었는데, 놀랍게도 복도 양편으로 여직원들이 무리로 서 있었다.

단체로 마실이라도 가는 걸까? 하나같이 생글거리는 얼굴이었는데,

묘하게도 손톱만은 바짝 치켜세워져 있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한 여자가 확 나를 잡아당겼다.

그것이 신호였고, 여자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며 나를 습격했다.

무리 앞에서 반항은 감히 가당치도 못했다.

인류 역사상 최다의 여자들에게 폭행 또는 강간당한 사내로 기네스북에 기록되는 건 아닐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들은 내 육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내 옷은 선거가 끝난 후보자의 벽보처럼 너덜너덜 보기에 흉했다.

그 많던 여자들은 이미 다들 사라지고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놀라 고즈넉이 창가 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깔린 창 밖으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왜들 나만 갖고 그래? 왜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 거야?

내가 그리 만만하게 보여? 대체 이유가 뭐야? 엉?”

 

소리쳤지만 인적이 없는 복도는 휑했다.

그러나 이런 순간 누군가는 반드시 나타난다.

누군가의 손 하나가 위로하듯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왔다.

안타까운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구한 팔자야. 아주 지랄 같은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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