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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21

오늘의 쉼터 2015. 6. 9. 16:03

그녀의 시간표 21

 

 

그녀가 그림 속의 떡이라니? 알다가도 모를 소리였다.

분명한 건 팀장뿐만 아니라 사장까지도 그녀를 먹기 좋은 떡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사내란 짐승들의 본질이 원래 그렇다곤 해도 어째 너무하구나 싶었다.

나는 자판을 두들겨 이렇게 써놓았다.

‘아무리 사파리에서 산다고 하여 인간임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어찌하여 저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임을 저리 안달하며 주장하는 것일까.

 

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면 소문을 모으기 위해 일부러 내가 몸을 수고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요즘은 공개모집이 대세다. 이런 깨달음이 있어 어제 퇴근길에 피씨방에 들렀고,

포털서비스업체에서 제공하는 이메일 세 개를 새로이 만들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이메일은 신분이 드러날 경우 처지가 곤란해질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출근시간보다 퇴근시간을 더욱 엄격하게 지킨다.

나는 모니터에 띄워져 있던 글자를 지우고 ‘이벤트’라는 제목으로 글자를 써넣었다.

 

‘홍지연 대리와 관련한 정보를 구합니다.

정보제공자 중 다섯 분을 선정, 이십만원 상당의 사례금을 드립니다’

 

그 아래쪽에 정보제공자가 신원공개 없이 이용하도록 비밀번호를 밝힌 두 개의 이메일,

그리고 정보를 수신할 이메일 주소 하나를 따로 적어두었다.

자질구레한 세부사항도 잊지 않고 남겨놓았다.

‘루머를 비롯한 어떤 정보도 상관치 않음. 증거자료 첨부 시 선정가능성 보다 높아짐.

반드시 성별을 밝혀줄 것’.

오자는 없는가, 다시 살펴본 다음 엔터키를 눌러 프린트를 시작했다.

 

출력된 광고지를 양복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 퇴근을 서둘렀다.

퇴근하면서 회사 구석구석에 광고지를 붙여놓았다.

우선적으로 고려한 장소는 여직원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여직원 휴게실과 탈의실, 구내식당이었다.

엘리베이터 입구나 내부에도 광고지를 붙이기에 적당한 장소였지만,

거기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작업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모처럼 휘파람을 불며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만사 젖혀두고 책상머리에 앉아 러브레터를 휘갈겼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니 손놀림이 여느 때와 달리 가볍고 부드럽다.

 

나의 러브레터의 시작과 끝은 늘 한결같다.

시작은 ‘석화엄마에게’, 마지막은 ‘당신의 사랑 명태가’이다.

자식은 일찌감치 하나만 갖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이름을 짓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닌지라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뿐더러 성명학까지 뒤적이고 나서야 겨우 이름을 정할 수 있었다.

 

다음날 바지런히 출근했다. 경쾌한 기분으로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어째 광고지가 보이지 않았다.

고생고생하며 광고지를 붙여놓았는데, 밤사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이 모양이란 말인가?

이유는 곧 밝혀졌다.

 

사무실 입구, 청소담당 아주머니가 빗자루로 허공을 콕콕 찌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어느 인간인지 몰라도 걸리면 가만 안 둘겨!

사람 고생스럽게 쓸데없는 광고지나 이곳저곳 붙여놓고…

내 손에 걸리는 날엔 그 못된 손모가지를 그냥 팍…”

 

아주머니의 시선이 은근슬쩍 나를 스쳤다.

순간 놀란 자라처럼 한껏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광고지 효과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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