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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19

오늘의 쉼터 2015. 6. 7. 12:01

그녀의 시간표 19

 

 

 세상에는 유별나게 포기가 빠른 인간들이 있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완벽한 계획이라 해도 시행착오는 늘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계획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제법 그럴싸했던 계획이 지독하고 악랄한 두 인간 때문에 보류돼야 하다니,

나로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아,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내 눈을 가렸던, 내 입을 찢었던 거대한 손의 기억!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나는 그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를 꾸역꾸역 되삼켜야만 했었다.

나의 고통은 그들의 행복,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설정은 한동안 지속되었고,

그러다 나는 깜박 정신을 놓았다. 간신히 제정신을 수습했을 때,

짙은 안개 같았던 담배연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고,

휴게실 안의 생명체는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날… 샌드백으로 취급했겠다…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겨!”

 

집단폭행만으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인데 고문까지 내게 자행했다.

모르긴 몰라도 실형을 각오해야 하리라.

하지만 내 의지는 더는 전진하지 못하고 정확히 거기서 스톱돼야 했다.

나는 놈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나를 희롱했던 손바닥의 감촉만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몸을 뒤적여 휴대폰을 찾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했다.

바늘에 찔린 것처럼 삭신이 쑤셨고, 이런 몸으로는 도무지 직립보행이 가능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놓고 나왔는지 휴대폰은 없었다.

결국 고개를 삐죽 내밀어 복도를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휴게실에서 사무실까지는 불과 30미터,

그래도 내게는 아득하게 보였다.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엉금엉금 복도를 기어갔다.

여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포기할까 여러 번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허나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내게는 있었다.

최근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인간의 직립보행은 약 450만년 전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의 행위는 무려 4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민방위훈련? 아니면, 폭탄테러 메시지라도 받은 거야?

책상 귀퉁이에 고스란히 놓여 있던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그럼 그렇지… 다들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배를 불릴 시간이다.

시장기를 느꼈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차라리 잠시 눈이라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징글벨 징글벨 징그으르벨…”

 

책상에 얼굴을 파묻는데, 느닷없이 휴대폰에서 크리스마스송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전직 이종격투기 선수였던 한 인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었다.

 

“최고의 명곡으로 벨소리를 골라놨어. 니 맘에도 들 거야.”

 

그동안 벨소리 설정이 진동모드여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명곡을 감상했다.

어쨌거나 모르는 발신번호였다.

귀찮기도 했지만 맞기만 했는데도 이만저만 몸이 피곤한 게 아니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띵…동.

이미 감았던 눈을 애써 게슴츠레 뜨고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누군지 몰라도 정성이 지극하다.

 

‘그 정도로 교육이 끝났다고 착각하지 마.

조만간에 재교육이 실시될 거다… 통지서 보낼게.’

 

도대체 이놈들이 누구야?

요즘 회사는 깡패들도 뽑는 거야?

회사가 깡패양성소야 뭐야?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녀와의 연관으로 그들이 주먹을 휘둘렀다는 사실이다.

대체… 왜? 생각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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