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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20

오늘의 쉼터 2015. 6. 7. 12:07

그녀의 시간표 20

 

 

 한잠 곤하게 잔 것 같다.

누군가 흔들어 깨웠고 게슴츠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양복 차림의 사내가 어슴푸레 시야에 잡혔다.

 

“자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낮잠 잘 때 귀찮게 구는 것이 얼마나 야비한 짓인지.

팀장이라도 못 참아!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주마.

엎드린 채 슬그머니 눈을 치떴다.

 

아아, 그 순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되감아야 했다.

누군가 레이저빔을 발사한 것이 아닐까,

순간 의심했을 정도로 빛은 강렬했다.

재빨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눈이 멀 뻔했다.

이번에는 조심조심하면서 실눈으로 게슴츠레 양복을 살폈다.

 

그럼 그렇지! 요즘 유행이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양복에 금가루라도 뿌렸는지 유리창을 투과한 햇살이 황금빛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팀장의 재력으로는 저런 고급양복은 상상으로도 어림없었다.

양복이 팀장이 아니라면야 무엇이 겁나겠는가.

양복을 향해 사납게 이맛살을 좁혔다.

 

“이봐… 좀 비켜줬으면…”

 

채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양복이 슬그머니 손을 뻗더니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왔다.

텔레비전을 보면 동물들은 친밀감을 나타낼 때 스킨십을 이용하던데…

동물적인 인간인가?

나 역시 양복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의미로 히죽 웃어 주었다.

느닷없이 뾰족한 물건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설마… 칼? 칼에 찔린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범인은 확인해야 한다.

범인은 역시… 팀장이었다.

범인인 주제에 뻔뻔하게도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관등성명… 관등성명!”

 

나는 죽어가는 인간이었고, 전혀 겁날 것이 없었다.

팀장을 무시하고, 작달막한 키의 양복 사내를 찬찬히 살폈다.

어디선가 본 듯한데 언제 어디서 봤는지 도통 기억이 흐릿했다.

 

“팀장, 회사가 싫어진 거 아닙니까?

믿고 맡겼더니 복지부동이라…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시… 시정하겠습니다!”

 

“올해 신입사원 중 사내는 고작 한 명인데…”

 

악! 팀장의 입에서 갑자기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손으로 정강이를 감싼 채 팔짝팔짝 뛰었다.

양복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명태씨, 화중지병(畵中之餠)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까?”

 

질문은 양복이 했는데 별안간 팀장이 끼어들더니,

‘짧게 대답해’라며 그 와중에도 언질을 주었다.

팀장의 소망대로 짧게 네 글자로 대꾸해 주었다.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이런 유치한 놀이를 하던데,

아마도 양복이 골수팬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하지!”

 

양복이 헛기침을 했고,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팀장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팀장의 입에서 또다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명태씨, 그림 속의 떡은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냐.”

 

양복이 뭉툭한 손 가락으로 내 명치를 콕콕 찌르면서 말을 이었다.

 

“제 분수도 모르고 깝죽대긴…”

 

분수라… 문득 양복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났다.

팀장의 자리 뒷벽으로 금테의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액자는 이른바 대두(大頭)로 통용되는 한 사내의 상반신 초상화였다.

 

“아… 맞다, 가분수!”

 

그 순간 뾰족한 물건이 또다시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고통이 극심했고, 결국 난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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