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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16

오늘의 쉼터 2015. 6. 6. 16:18

그녀의 시간표 16

 

 

 

 

 

나…. 남자 있어요.

 


대체 누구야?

큰 소리로 되물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좀더 신중해지고 싶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한참을 고심했다.

이윽고 그녀에게 대꾸할 적당한 단어들이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그래도 난 당신을….”

 


내 스스로 말을 끊어야 했다.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쩐 일로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는데,

옥상 입구 저편에서 목소리가 흘러왔다.

 


“러브레터, 앞으로 보내지 말아요. 유치하고 위험해요…”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후로 러브레터는 책상 두 번째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책상서랍을 열 때마다 사직서와 러브레터의 엄청난 양에 나는 매번 놀랐다.

그 양에 비례하여 나의 분노와 간절함 역시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녀, 홍지연… 포기할 수 없었다.

 


“고추 달린 짐승이… 칼을 뽑았으면 아예 끝장을 봐야지!”

 


저세상에서 어미가 소리치고 있었다.

김장철이면 어미는 당신이 한석봉의 어미와 대등한 위치임을 내게 각인시켜 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뎅강뎅강 무를 잘라내며, 어미는 내게 ‘보카33000’을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보라며 종용했다.

시퍼렇게 날선 부엌칼은 어미의 권위였다.

덕분에 나는 보카33000을 마스터했고, 덤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난 남자다. 결코 포기해선 안 돼!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야무진 각오는 곧 걱정과 우려로 둔갑한다.

사무실 안팎으로 그녀를 사모하는 짐승들은 무수하게 많았다.

사무실의 짐승들을 한 마리씩 찬찬히 뜯어보았다.

저마다 업무에 바쁜 척 나름대로 액션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팀장은 늘 자신의 높은 지위를 십분 활용한다.

짙은 선글라스에 턱을 손으로 치받히고 모니터에 집중해 있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확인이 불가능해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딘지는 뻔하다.

경계대상 일순위의 요주의 인물이다.

그래도 차장은 꽤 순진한 축에 속한다.

팀장의 눈치 살피랴 홍대리 쳐다보랴 몹시 바쁘다.

저리 눈을 혹사시키다간 사팔뜨기가 되는 게 아닌지 염려스럽다.

그래도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송과장은 신체적 우월성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그는 앉은키가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쯤 크다.

넓은 시야 속에는 홍대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일일이 체크되고 있을 것이다.

음흉하기로는 사무실에서 단연 최고, 감춰진 발톱이 언제 어느 때 드러날지 몰라 적잖게 불안하다.

박대리와 강대리는 아무래도 묵계를 맺은 것 같다.

박대리가 상급자를 감시하고, 강대리가 손안에 든 무엇인가로 홍대리를 겨냥하고 있다.

아마도 핸드폰이거나 디지털캠코더일 것이다.

혈기왕성한 두 사람, 어쩌면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저들은 팀플레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아아, 여긴 사무실이 아니라 사파리였다.

휴우,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어찌해야 그녀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짐승의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연애의 필승전략은 있을 것인데….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파리에서도 이 방법이 통할까?

조금 미심쩍긴 해도 가만히 뒷짐 지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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