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그녀의 시간표

그녀의 시간표 15

오늘의 쉼터 2015. 6. 6. 16:12

그녀의 시간표 15

 

 

 

발하고 독특하며 창의성이 뛰어나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직업을 선택할 때 좀더 신중했어야 한다…

내가 아닌 팀장의 얘기다.

한쪽 구두 벗고 제자리뛰기, 볼펜 입에 물고 수평선 유지하기,

A4용지로 파도타기… 세상에 이런 얼차려도 다 있구나,

땀을 뻘뻘 흘리다가도 절로 탄성이 터지고 만다.

이런 기막힌 얼차려들이 어쩜 그리도 막힘없이 술술 풀어져 나오는지…

바라건대 팀장의 머리를 쪽 반으로 갈라 그 속을 들여다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

 

팀장의 탄압과 박해는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어쭈, 이러다 우리 회사에 부처 났다는 소문 돌겠는걸.”

 

팀장은 꼭 뒷말을 덧붙였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야. 감히…”

까르륵 웃음소리가 요란해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저들의 천박하고 유치한 짓거리쯤 얼마든지 참고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엄청난 배신감에 시달려야 했다.

저들의 수작에 동조하여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박수까지 마다하지 않는 그녀…

그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며 견뎌야 했다.

왜, 어쩌자고 그녀는 저들의 수작에 동조하는 것일까?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것이 다 누구 때문인데.

 

한시라도 빨리 이런 어처구니없는 코미디를 끝내고 싶었다.

밤새워 러브레터를 썼다.

아침이면 손목이 저릿저릿했지만,

편지를 그녀에게 전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고통은 사라졌다.

이 또한 위대한 사랑의 힘이 아니겠는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자주 시험대에 올라야 했다.

 

내가 보낸 편지는 이삼일 후면 어김없이 회사 내에 공공연하게 굴러다녔다.

사무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 사람들도 편지내용을 훤히 알고 있었다.

원본 혹은 복사된 편지가 복도나 화장실을 비롯해 회사 곳곳에 나붙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도 편지를 보았는지,

나만 보면 괜스레 히죽히죽 웃었다.

하루는 옥상에서 단 둘이 만났다.

 

“내가 보낸 편지… 다리가,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여기저기 돌아다니죠?”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

일전에 데이트를 약속하고도 못 나왔던 이유가 비로소 밝혀졌다.

하지만 단지 그뿐일까?

나는 형사 콜롬보처럼 고개를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재차 그녀의 심중을 파고드는 질문을 던졌다.

…그 편지의 외출, 혹시 주인이 허락한 게 아닐까요?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나를 째려보며 눈꺼풀을 씀벅거렸다.

아무래도 위험한 분위기였다. 얼른 화젯거리를 바꾸었다.

 

 

“얼마 전, 여기서 눈물을 흘리는 당신을 봤어요. 덩치가 곰만한 사내도 봤고…”

“울어요, 내가? 그런 기억 없는데… 올해 옥상에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이상하네?”

 

뻔히 내 눈으로 봤는데 시치미를 떼다니. 더구나 사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니.

나는 시력이 1.5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하는 눈길에 은근하게 불만을 실었다.

그것을 느꼈는가. 시무룩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그녀가 이렇게 변명했다.

 

“날… 사랑하지 말아요. 나… 나쁜 여자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난 얼굴값 하는 여자예요’라고 받아들였다.

남자들도 엄연하게 눈이 있는데, 그녀를 가만히 놔두고자 하겠는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게 남자의 심리였고, 어차피 감내할 것을 작정하고 시작한 구애였다.

하지만 그녀가 덧붙인 뒷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소설방 > 그녀의 시간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의 시간표 17  (0) 2015.06.07
그녀의 시간표 16  (0) 2015.06.06
그녀의 시간표 14  (0) 2015.06.06
그녀의 시간표 13  (0) 2015.06.04
그녀의 시간표 12  (0) 201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