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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13

오늘의 쉼터 2015. 6. 4. 23:18

그녀의 시간표 13

 

 

 

 

자. 참는다, 참아야 한다… 아무리 팀장이 구박해도 꿋꿋이 버텨야 한다.

 

구박덩어리 신데렐라의 전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녀의 유일한 장점은 미련할 정도로 인내심이 강했다는 것.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왕자를 만나는 건 고사하고 진작에 가출하여

 

파란만장 미스 ‘신’으로 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나는 개구리 왕자다. 개구리처럼 납작 바닥에 엎드려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

 

펄쩍 뛰어오르는 그날,

 

그녀는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몸달아할 것이다.

 

그날은 반드시 온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볼펜이 날아왔다.

 

그것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미처 피하지 못했다.

 

피해야 한다는 생존본능조차 우둔하게도 발휘되지 못했다.

 

심신이 피곤한 탓이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의 무게였고, 책상은 묘하게도 침대처럼 보였다.

 

비몽사몽간이었고, 그러니 팀장이 던진 볼펜에 여지없이 얻어맞고 말았다.

 

순자와 맹자는 큰 실수를 했다.

 

성악설, 성선설… 주장하기에 앞서 팀장을 만나보았더라면,

 

아마도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팀장은 견제구로 눈에 시린 1루 주자를 잡아낸 투수처럼 어깨를 빙빙 돌리며 의기양양해 했다.

 

“어이!”

 

또다시 팀장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나를 불렀다.

 

요사이 팀장이나 팀원들 모두 나를 호칭할 때면 어김없이 ‘어이’였다.

 

이름을 잃으면 존재도 지워지는 법인데…

 

이 세상에서 나만큼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자네한테 오늘의 운기 좀 봐줄까 하고…”

 

쪼르륵 달려왔더니, 고작 이거였어?

 

근무시간에 졸았다고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딴에는 다행이다 싶다.

 

“스물아홉, 맞지? …읽어줄 테니, 토끼처럼 당나귀처럼 귀 바짝 쳐들고 들으셔.”

 

비위에 거슬리는 비유였으나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내 입에 맞는 떡이 없듯 직장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비우면 그리 나쁜 날도 아니다.

 

햐, 귀신이 따로 없네. 어떻게 생각해?

 

팍 하고 가슴을 찔러오는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상체를 의자 뒤로 한껏 젖힌 팀장이 잠자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글쎄요. 마지못해 대꾸했는데 마뜩지 못했던 모양이다.

 

팀장이 큰소리로 신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친구관계는 좋으나 부하직원이 말썽이다.

 

직장이 편안해야 심신이 가뿐하다…

 

오늘의 내 운기야. 어째 자네와 상극 같지 않아?”

 

대꾸가 없자 팀장이 제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마음을 비우면 그리 나쁜 날도 아니라잖아?

 

내가 왜 널 못살게 구는데? 자르고 싶어 환장하는 이유가 뭐겠어?

 

인간아… 마른명태처럼 생긴 화상아… 제발 이해 좀 해라, 이해!”

 

마·른·명·태? 결국 올 것이 왔는가. 늘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는데,

 

또 다시 이름을 잃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팀장이 낌새를 챘는지 슬며시 입술 끝자락을 말아 올렸다.

 

“마명태… 마른명태? 마른명태라…”

 

순간 사무실이 왁자지껄해졌다.

 

‘어이’에서 다시 ‘마른명태’로 이름이 바뀌는 참혹한 순간이었다.

 

 탕탕탕.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쳐가며 웃는 사람이 있었다.

 

함지박하게 벌어진 입, 불그스름한 입술… 우라질, 그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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