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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12

오늘의 쉼터 2015. 6. 4. 23:13

그녀의 시간표 12

 

 

 

회사에서 메신저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혹시? 얼른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모니터 화면에 푹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래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게 뭔 소리야? 회사 홈페이지 직원 게시판?’

 

문자메시지는 다소 엉뚱했다.

 

…당신 때문에 불났어요,

 

불! 보낸 사람의 번호는 119였다.

 

서둘러 직원 게시판을 찾아 들어갔다.

 

한 남자의 얼굴과 여자의 나신이 합성된 사진,

 

음모와 모함으로 가득한 글들로 게시판이 넘쳐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였다.

 

이토록 비참하고 끔찍한 내 얼굴을 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사무실 곳곳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어떤 정체를 알지 못할 남자와 모 카페에서 키스했고,

 

모 호텔로 팔짱을 끼고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거나,

 

현재 한 남자와 동거 중이라는 둥 글들은 황당한 내용 일색이었다.

 

하나같이 헛소리였고 나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었고, 악의에 찬 음모였다.

 

이 음모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쉽게 짐작이 갔다.

 

그는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도대체 왜들 이러세요? 내가 그리 만만합니까?

 

나도 성깔 한번 부려볼까요? 나, 더럽고 지저분한 놈입니다.

 

바늘로 허벅지 콕콕 찔러가며 애써 참고 참으며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가는

 

무지 불쌍하고 가여운 놈이에요.

 

부탁하는데…. 자꾸 자극하지 마세요.

 

특히! …존경하는 팀장님, 이하 선배님들!

 

내가 여러분의 제삿날이 언제인지 가르쳐 드릴까요?

 

내가 사직서를 던지는 날…. 바로 그날이 합동기일입니다.

 

부디 명심하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콕 쏘아주고 싶었다.

 

비호처럼 날아서 이단옆차기로 팀장의 면상을 힘껏 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상만 그랬을 뿐, 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끽소리 못하고 참아야 하는 이유, 너무나 분명했다.

 

홍,지,연.

 

그녀를 남겨두고 혼자 떠나는 건 치사했다.

 

남자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때까지 이단옆차기는 자제해야 하는 것이다.

 

헛헛하게 웃었다.

 

모니터 속의 세상, 말이 말을 낳는 무자비한 난장판.

 

사람들은 앞다투어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진실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묵언수행을 하던 홍대리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내가 묵언수행을 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처음부터 나는 수행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한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따로 정해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조금만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자판을 두드렸다. 웃음을 멈춘 저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내가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저들은 나보다도 더욱 궁금한 듯 얼굴에 호기심이 진득하다.

 

나는 게시판에 이렇게 써놓았다.

 

‘마명태입니다. 한 남자로서… 저희 팀장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팀장님과 나… 갈 때까지… 갔습니다.’

 

쾅. 누군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저 인간… 카리스마 어쩌고저쩌고 하는 저 인간… 내 저럴 줄 알았다.

 

고통으로 팀장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어쩌면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내가 웃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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