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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1

오늘의 쉼터 2015. 5. 31. 19:27

그녀의 시간표 1


 

 

 

 

“벌써, 퇴근시간? 오랜만에 회식 어때요?”

 

오랜만? 이틀 전에 거나하게 놀아난 건 회식이 아니었나?

 

“좋습니다, 팀장님. 펑펑 남아도는 시간, 열정이나 불태우죠?”

 

어이, 차장. 불태울 열정이나 있어. 가장 빈약한 정력의 소유자가 바로 당신이잖아.

 

“열정이라… 좋지.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야.

 

잠시라도 사랑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숨이 콱 막혀버리니…

 

아, 이 죽일 놈의 사랑을 어찌해야 하는지…”

 

“팀장님은 역시 로맨티스트… 아니죠. 시인, 시인이에요!”

 

정말이지 로맨티스트이자 시인이라는 저 인간의 숨줄을 으득 끊어놓고 싶다.

 

“다들 굿?”

 

“회식 불참은 무조건 적입니다, 적!”

 

시대가 변하지 않아 아직 만담이 유행하는 시기라면, 팀장과 차장은

 

최고의 인기연예인으로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 장담한다.

 

만담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유치찬란한 저들의 만담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어쩌나… 정작 저들이 노리는 홍대리는 별 흥미가 없는 듯한 눈치였다.

 

물론 그래야 내 아내가 될 여자로서 당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겠지만.

 

퇴근 준비에 바쁜 홍대리를 불안한 시선으로 흘낏거리며 팀장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회식 막판은 포커입니다, 포커.”

 

“포커요? 이번에도 굉장한 라이벌전이 되겠네요.”

 

대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포커퀸이다.

 

대학시절부터 갈고닦은 솜씨라는 팀장도 만만찮은 실력파다.

 

이제까지 두 사람은 적지않은 게임을 치렀다.

 

신기하게도 팀장이 홍대리를 이긴 게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물론 홍대리의 지갑을 털기 위해 팀장이 포커판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다.

 

판돈이 떨어지면 몸으로 때워라.

 

몇 번쯤은 홍대리가 위기에 직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홍대리는 그때마다 엄청난 실력을 발휘, 위기탈출에 성공했다.

 

팀장은 그때를 잊지 못해 늘 아쉬워했다.

 

적어도 신사적인 방법으로 홍대리의 속살을 눈요기할 수 있는 기회.

 

팀장은 회식을 빌미로 언제나 몸달아했다.

 

“이봐, 이제 인원 체크 들어가야지.”

 

“아, 네… 적으로 남고 싶은 사람, 용감하게 번쩍 손을 쳐들어 주세요!”

 

영업지원팀은 전부 해봐야 고작 일곱, 여자는 홍대리가 유일하다.

 

사무실에서 그녀의 존재는 요정이자 마녀였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그래서 사무실 분위기는 급변한다.

 

팀장과 차장은 오늘 운이 좋지 못한 날이다.

 

오늘, 홍대리는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늘고 긴 팔 하나가 불쑥 허공을 찔렀다.

 

팀장과 차장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의 표정도 두 사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홍대리는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눈으로 좇던 팀장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로맨티스트? 시인? 유효기간은 이미 지났다.

 

표정이 급변한 팀장이 눈알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 다들 대가리 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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