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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4

오늘의 쉼터 2015. 5. 31. 22:10

그녀의 시간표 4


 

 

 

 

 

이웃집 형은 계절에 상관없이 검정 가죽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는 폼 나는 건달을 희망했는데,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부엌칼 자전거체인 같은 것들이

 

늘 방안에 가득했다.

 

그에게 그 물건들은 평범하지 않았고, 일종의 부적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했으면 그는 여자를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서 우연찮게 그의 그녀를 만났다.

 

사실은 엇비슷하게 생긴 여자였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세상에는 쌍둥이처럼 닮은 여자가 수도 없이 많고 흔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우리의 운명이에요. 아시겠어요?”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대뜸 내게 이렇게 말한 그녀는 자신을 무녀라고 소개했다.

 

남자보다 신(神)을 더 사랑한다는 그녀를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운명을 훤히 꿰뚫어보는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 나로서도 부담이 컸다.

 

내가 알기로 이웃집 형은 무패의 싸움꾼이었다.

 

그의 승리에의 비결은, 싸움에 나가기 전 항상 준비에 철저하다는 것.

 

커피광들을 상대로 멋지게 한판 놀아나기 위해서 나 역시 그러해야 했다.

 

나는 복대와 가죽장갑과 자전거체인을 준비했다.

 

복대는 배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였다.

 

주먹이 엇나가거나 엉뚱한 곳을 때렸을 때 부상을 당할 수 있는데,

 

이때 가죽장갑을 끼고 있으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자전거체인은 커피광들이 떼거리로 덤벼들 것에 대비해 챙겨 넣었다.

 

시계를 보았다.

 

아무리 서둘러도 지각, 내친김에 좀더 느긋하게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무실에 들어서며, 다소 시시껄렁하게 보이도록 폼을 연출했다.

 

일부러 어기적어기적 걸었으며, 입으로는 연신 휘파람을 휘휘 불어놓았다.

 

“오늘 컨디션… 제로상태입니다.

 

괜히 시비 걸지 마세요. 나도 내가 무서워 미치겠으니까.”

 

대가리 박아! 당장 이런 고함이 터져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어쩐 일로 팀장의 얼굴은 그지없이 온화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미리 전화 줬으면 푹 쉬라고 했을 텐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제스처? 조금 어리둥절했다.

 

“여러분, 커피 한잔씩 쫙 돌릴까요? 다들 커피 좋아하잖아요? 뽑아올까요?”

 

고마워, 잘 먹을게.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길 학수고대했다.

 

그 소리를 나는 내 행동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괜찮아. 다들 마셨어. 안 마셨으면 내가 한잔 뽑아다 줘?”

 

팀장이 웬일로 저런 선심을 다 쓴다고 나서는 걸까.

 

밤사이 저들의 정신세계 혹은 체질이 완전히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감도 잡지 못한 채 오후로 접어들었다.

 

점심식사도 했거니와 이제쯤 커피생각이 간절해지겠지.

 

하룻밤 사이 이들의 모든 것이 변했다 해도 입맛이 그리 쉽게 변하지는 못한다.

 

눈빛을 빛내며 호시탐탐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좀 늦었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일제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너나없이 우르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몰려갔다.

 

느닷없는 그들의 행동에 지레 놀라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로…고개를 뒤로 꺾었는데,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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