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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표 3

오늘의 쉼터 2015. 5. 31. 22:03

그녀의 시간표 3


 

 

 

 

후줄근한 자취방. 책상머리에 앉아 사직서를 끼적거렸다.

 

이제쯤 발가락으로 쓰라고 해도 가능한 것이 이 짓이다.

 

사직서쓰기대회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도장을 꺼내어 꾹 눌러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삼단의 책상서랍 맨 위쪽을 열어 봉투째 사직서를 떨어뜨렸다.

 

서랍은 가히 사직서의 무덤, 아니 내게는 폭탄저장고였다.

 

언제고 반드시 터뜨려야 할 폭탄. 수많은 사직서를 한꺼번에 팀장의 면전에 뿌리는 상상을 하자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머니는 당부했다. 제발, 엉뚱한 짓거리 좀 그만하고 살아라.

 

너 땜에 내가 제 명까지 못 산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 어미가 자식에게 마지막으로 할 소리는 아니다.

 

그래도 난 어미의 간곡한 유언을 가슴에 새겼고,

 

엉뚱한 짓거리는 자제하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했다.

 

졸업을 앞두고 남들은 대학원 혹은 대기업을 목표로 진력했지만,

 

어미의 유언을 받든다는 취지에서 일찌감치 중소기업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대만과 중국에서 부품을 들여와 컴퓨터를 조립판매하는 회사였다.

 

“명문이라면 명문대학인데… 학사장교 출신이고…

 

대기업에 넣었다가 많이 떨어졌나보네… 내 말, 맞지요?”

 

내 기준으로 어미의 유훈 통치기간은 3년이 만기였다.

 

면접관의 질문은 불쾌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 결과는 사흘 후에 나타났다.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연수교육 없이 곧바로 고객지원팀으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했다.

 

단순한 업무였다. 에이에스 신청이 접수되면 담당기사에게 연락해주고,

 

고객의 목소리 톤이 조금 높다 싶으면 방문하여 갖은 협박과 회유로 고객을 지치게 만드는,

 

조금 껄끄럽긴 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였다.

 

가끔은 고객의 요구사항이나 불편불만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하지만 예전 보고서에서 숫자만 약간 바꾸는 식이어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운 직장이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꼬박꼬박 월급 챙겨주지 마음 편하지. 나 역시 이 모든 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은덕이거니

 

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직장은 직장이다.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않는 직장이란 이 세상에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직장인과 스트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또한 스트레스는 업무량의 과소하곤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을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나는 실감하게 되었다.

 

입사하고 반년쯤, 나는 녹 다운 상태였다.

 

과다한 업무, 피곤한 인간관계, 이런 상투적인 이유들은 내 스트레스의 주범이 되지 못했다.

 

나를 미치게 만드는 요인은 정작 따로 있었다.

 

하루 종일 나는 지나치게 혹사당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나는 컴퓨터판매회사가 아니라 커피숍에 취직한 것이라 믿고 있었다.

 

고객지원팀, 이 인간들은 어찌된 게 하나같이 지독한 커피광이었다.

 

단지 무료한 시간을 버텨내기 위하여,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억지로 마셔대는 족속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어미에 대한 도리는 이미 할 만큼 했고, 돌아오는 월요일을 나는 거사일로 정했다.

 

사직서를 팀장의 면전에 던지며, “커피는 니 손으로 뽑아먹으세요” 한껏 이죽거려주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이 거사는, 그러나 기약없이 훗날로 미뤄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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