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9장 색정기 7 (끝)

오늘의 쉼터 2015. 5. 16. 10:06

제9장 색정기 7 

 

 

1.

 

봉수는 그날 주해원의 알몸을 감상하기만 한 채 끝냈다.

 

정신을 차린 주해원으로부터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건넨 음료수에

 

최음제가 들어 있었던 듯했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그런 범죄가 심심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늦은 밤의 버스, 택시, 그리고 이제는 비행기까지 여자 혼자서는

 

움직이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디어와 디자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컨셉은 정한대로 경면주사와 황금이었다.

 

주해원은 팀원들이 요구하는 어떤 지원도 망설이지 않고 해주었다.

 

호천수 회장과의 조율도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을 남겼다.

 

봉수는 모처럼 일할 맛을 느꼈다. ‘코지’의 부활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불타 올랐다.

 

작업에 몰두해 있던 어느 날 늦은 오후 봉수의 책상 앞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박봉숩니다.”

 

“바로 전화 받네.”

 

봉수의 첫사랑인 신수정이었다.

 

“어쩐 일이야?”

 

“신해수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봐 달라며?”

 

“메일로 보내면 되지.”

 

봉수는 일에 몰두해 있는 진국을 쳐다보았다.

 

“그냥 너 보러 왔어.”

 

“뭐?”

 

“나 상해에 왔다니까.”

 

“놀러?”

 

“아니, 우리 보험 회사가 상해로 진출했잖아. 상해팀 지사장으로.”

 

봉수는 반가웠다.

 

시내에 볼일이 있다는 어정쩡한 핑계를 둘러대고 서둘러 콘도를 빠져 나왔다.

 

신수정은 상해아파트에 집을 얻은 상황이었다.

 

봉수는 상해아파트로 향했다.

 

“언제 이런 준비까지 다 했어?”

 

“회사에서 해주는 건데 뭘.”

 

아파트는 여자 혼자 지내기엔 너무 넓었다.

 

족히 35평은 되어 보였다.

 

신수정은 봉수 앞에 커피를 내왔다.

 

그녀는 여전히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앞으로 여기 와서 지내도 돼.”

 

신수정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 아냐. 직원들도 있는데 어떻게…. 그나저나 알아보라는 건.”

 

“신해수? 그 여자 정말 무서운 여자더라.”

 

봉수의 직감이 사실이었다.

 

신해수는 ‘비라’의 주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근에 보유한 주식이었다.

 

월급쟁이로서는 갖기 힘든 양이었다.

 

놀라운 건 그녀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코지’ 사장인 차몽현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차 사장은 미국에서 꽤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녔던 것이었다.

 

“……결국 그래서 신해수가 그런 짓을 벌인 거구나. 중간에서 로비 다하고 말야.”

 

“맞아. 차 사장한테 복수 한 거지.

 

강 이사나 노애란이라는 디자이너 역시 신해수가 만나서 협상했대.

 

그러니까 로비스트야. 표면상으로는 가이아 백화점의 구매담당 실장이지만

 

실은 ‘비라’의 숨겨진 기획 실장이라고나 할까?”

 

봉수는 먼저 진국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봉수의 머리 속은 이내 뒤죽박죽 되었다.

 

신수정이 입고 있던 원피스를 훌렁 벗어 던지고 달려든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봉수의 아랫도리가 오랜만에 불끈 솟아올랐다.

 


2.


진국은 오늘 벌어질 란제리 쇼 기획 내용들을 점검했다.

 

한국 여성 모델, 180cm에서 185cm 키의 모델들 20명, 중국인 모델 30명,

 

금무대하 빌딩 스카이 라운지 최종 점검.

 

중국 모델 30명과 금무대하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 대여는 호천수 회장의 도움이었다.

 

진국은 머리 속에 리허설 장면을 그려보았다.


진국은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찬바람이 가슴을 쓸었다.

 

신해수의 존재를 알고 연락을 끊은 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가슴 아프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결혼하기에 적당한 여자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여자는 아니었던 때문이었다.

 

봉수가 출근했다.

 

상해 시내에서 신수정과 함께 살기 시작한 뒤 그는 출퇴근을 했다.

 

그래도 언제나 팀원들이 깨어나기 전에 출근했다.

 

“일찍 왔네?”

 

“그래, 모델들은?”

 

“오늘 9시에 도착할 거야.”

 

“빨리들 깨워야겠다.”

 

봉수가 서두르기도 전에 팀원들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봉수 선배님은 날이 갈수록 얼굴 살이 빠지는 거 같아요. 작작 좀 해요.”

 

병달이 봉수를 쳐다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팀원들이 미소를 지었다.

 

팀원들은 서둘어 아침을 먹은 후 금무대하 빌딩으로 향했다.

 

이가성과 왕조선 역시 함께 출발했다.

 

그들이 금무대하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갔을 때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을 정도로 이른 시각이었다.

 

‘저렇게 찬란하게 이 쇼가 성공했으면 좋겠다.’

 

진국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각자 흩어져서 준비 사항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진국은 대기실로 들어가 준비된 속옷을 점검했다.

 

모두 50명의 여자 모델이 입을 500벌의 속옷이 차례 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마이크를 점검하고 있을 때 진국의 휴대폰이 울렸다.

 

채연이었다.

 

“저희 지금 막 리무진 타고 그리고 이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일본에서 에이꼬 점장님도 오셨어요.

 

동참해 주시겠다고요.

 

에이꼬 언니가 있으면 모델들 리드하기도 편하잖아요.”

 

에이꼬,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녀를 못 본 지 벌써 반년은 되는 듯했다.

 

금무대하 빌딩으로 장비들이며 사람들이 하나 둘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장소나 장비들은 물론 무대 역시 상해에서는 최고급이었다.

 

그건 모두 호천수 회장의 도움이었다.

 

“진국아, 강 이사한테는 초청장 보냈냐?”

 

“응, 보냈지. 그 놈이 와서 봐야 맛이 나지. 실은 신해수도 불렀다.”

 

진국은 봉수와 주먹을 부딪힌 뒤 씁쓸하게 웃었다.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 채연과 한국 모델들이 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에이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에이꼬는 진국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와 안겼다.

 

“얼마만이니?”

 

“반년?”

 

에이꼬는 진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너무도 자연스레 진국의 입술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진국이 당황했지만 에이꼬는 막무가내였다.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거나 웃었다.

 

“진국아, 오늘 쇼 끝나고 잠 잘 생각하지마.”

 

에이꼬가 진국의 귀에 낮게 중얼거렸다.

 

진국은 붉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3.


리허설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호천수 회장이 약속했던 중국 모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진국이 호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모델들 올 때가 지났는데 어떻게 됐나 싶어서요.”

 

“어? 출발을 했을 텐데? 내 알아 보죠.”

 

뭔가 어긋났다는 기분이 잠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호천수의 약속이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닐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국은 물론 팀원들 모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호천수 회장에게서도 전화가 없었다.

 

“진국아, 이번엔 뭐가 잘못된 거지?”

 

“믿고 기다려 보자.”

 

호천수 회장에게 전화를 건 지 1시간 만에 그녀가 직접 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국씨 미안하게 됐습니다.”

 

호천수의 첫마디에 진국은 물론 봉수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먼저 보내 드리기로 했던 모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비라’ 란제리 리허설 장에 가 있는 겁니다.

 

그쪽 쇼는 일주일 뒤에나 있는 대도 말입니다.

 

강 이사 그 놈 진작부터 그런 야비한 놈인 줄 알기는 알았지만 이런 술수를 쓰는 놈인 줄은 몰랐네요.”

 

“그럼……”

 

진국이 걱정스럽게 입을 뗄 즈음 홀 입구에서 왁자지껄,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델 경험이 풍부한 모델들 구하느라고 시간이 걸렸습니다.”

 

호천수 회장은 새로 모델 30명을 구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녀가 중국이나 홍콩 그리고 동남아 일대는 물론 일본, 한국에서도 신뢰를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봉수씨도 틀림없이 약속 지켜야합니다.”

 

봉수는 쇼가 끝나는 대로 300호 짜리 대형 누드 제작을 의뢰 받은 상태였다.

 

호천수 회장이 도와주는 조건이었다.

 

물론 호천수 회장 자신의 누드였다.

 

팀원들이 판로에 전념하는 동안 봉수는 그녀의 누드 그리기에 전념하기로 된 것이었다.

 

“말이다 뿐입니까.”

 

봉수는 얼굴을 붉히며 호천수 회장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쇼가 시작될 때 오겠습니다.”

 

그녀가 돌아갔다.

 

“차 사장은?”

 

“연락은 했는데, 온다고 했는데 뭐라고 확답을 안 하더라.”

 

진국은 여전히 차 사장이 미덥지 않았다.

 

자신의 회사 사활이 걸린 이벤트가 열리는 날 어찌될 지 모르겠다는 답변을 했던 것이다.

 

“공부를 하는 지 연애를 하는 지 알 수가 있어야지.”

 

“들리는 소문에 말야, 차 사장이 본가에 드나든다는 소문이었다.”

 

“본가에는 왜?”

 

“모르지. 오성 회장이 뭔가 술수를 부리는 거겠지.”

 

“잘하면 못 올 수도 있겠네.”

 

진국은 물론 봉수 역시 그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저 여잔 정말 걸물이야.”

 

봉수가 주해원을 가리켰다.

 

그녀는 묵묵히 장갑을 끼고 여느 인부들 못지 않게 일을 하고 있었다.

 

독산동 노랭이인 황 사장이 권한을 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매사에 최선이었다.

 

스케치용 연필 하나를 깎아도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깎았다.

 

진국은 조명을 점검하고 음향을 점검했다. 모델들의 지휘는 에이꼬가 맡았다.

 

기획된 쇼의 시나리오를 본 후에 그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4.


몇 차례 맞춰 보지 않았지만 에이꼬의 카리스마가 강한 탓인지

 

아니면 경험이 풍부한 모델들 덕분이었는지 리허설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옷 정말 너무 섹시하고 예쁜 거 알아?”

 

리허설이 끝난 후 휴식 시간이었다.

 

본격적인 쇼가 시작되려면 2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때 에이꼬가 호들갑스럽게 진국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뿐만이 아냐. 모델들 전부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니까.”

 

황금과 경면주사의 조합. 팀원들의 모든 머리가 그 조합에만 맞추어져

 

50가지의 샘플이 마련된 것이었다.

 

타이틀 명은 ‘레드 문’이었다.

 

처음의 아이템과는 180도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했다.

 

저가도 아니고 중저가도 아닌 최고가의 속옷으로 출발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중국 여자라면 ‘레드 문’을 입어야만 중국의 상류층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전략이었다.

 

반응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델들이 좋아한다니 일단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에이꼬는 신 회장에 대해 물었다.

 

“일 때문에 며칠 전에 들어오셔서 아마 지금쯤 상해에 도착하셨을 거야.”

 

신 회장도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던 것이다.

 

호천수 회장과의 밀담이 있는 듯했지만 진국은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리허설이 끝난 후라 그런지 스카이 라운지 홀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진국과 봉수 그리고 에이꼬는 홀 안을 둘러보았다.

 

족히 1000여명 가까운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확실히 만월이지?”

 

“확실하다니까. 구름만 안 끼면 되는데.”

 

봉수의 걱정에 진국은 자신없게 대답했다.

 

이번 이벤트의 포인트는 바로 달에 있기 때문에 달이 필요했다.

 

스카이 라운지는 무대 쪽 1/3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달빛이 홀 안을 훤히 비출 수 있었다.

 

달빛이 있을 때 이가성과 왕조선에게 ‘레드 문’을 입힌 후 리허설을 했던 일이 있었다.

 

달빛과 속옷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문제는 달이 뜰 때 구름이 없어야만 했다.

 

“믿어 봐.”

 

잠깐 무대 뒷편 대기실 쪽에서 여자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레드 문’ 란제리 쇼 한 시간 전. 초청한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 절반 이상은 호천수 회장의 도움을 받아 초청한 중국 각지의 기업인들, 유명인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자리가 메워지고 있었다.

 

귀빈석으로 준비한 자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역시 신 회장이었다.

 

“아들, 수고 했구나. 해수한테는 연락해 보니?”

 

신 회장이 느닷없이 신해수에 대해 물었다.

 

진국은 할 말이 없었다.

 

“그 애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근본은 착한 애니까.”

 

“근본이 안 착한 사람도 있습니까?”

 

진국은 그 말을 남기고 대기실 쪽으로 걸어갔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진국은 신해수 일에 대해 알게 된 후 그 고민이 가장 큰 화두였다.

 

사랑? 우정? 행복? 신의? 진국이 내린 결론은 믿음이었다.

 

신해수는 믿음을 배신한 여자였다.

 

해수는 진국과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차 몽현의 옛 애인이었음을 고백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진국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대기실에 모여 있는 모델들을 둘러보았다.

 

모델들은 모두 화려했고 섹시했다.

 


5.


귀빈석까지 모두 채워졌다.

 

호천수 회장, 중국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 진국의 양 어머니인 신 회장,

 

독산동 노랭이인 황 사장, 안 나타날 줄 알았던 강 일환과 그의 부인,

 

각 지역 백화점의 사장들. 그러나 신해수와 차 몽현은 보이지 않았다.

 

진국과 봉수는 그러려니 했다.


“자, 다들 준비 해요.”

 

란제리 쇼의 총 지휘는 진국이 맡고 있었다.

 

쇼 시작 10분전이었다.

 

홀 안이 낮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진국은 초조하고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큰 무대를 지휘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코지’의 사활이 달린 행사인 때문이었다.

 

“진국아, 나쁜 소식이다.”

 

진국이 쇼 진행표를 다시 점검하고 있을 때 봉수가 다가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음향에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면 구름이라도?”

 

진국은 천장 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구름이 달빛을 가리고 있었다.

 

봉수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구름이 문제가 아냐.

 

한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차 사장이 옛날 우리 사옥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어.”

 

진국은 해머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에게 유서를 남겼대. 미안하다고.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고.”

 

“바보 같은 놈!”

 

진국은 처음으로 차 사장에 대해 욕을 했다.

 

하지만 이 쇼를 멈출 수는 없었다.

 

독산동 황 사장의 계약 조건에는 어긋나지만 회사 경영은 전문 경영인이 맡을 수도 있었다.

 

슬프지만 쇼는 진행되어야만 했다.

 

“또 누가 알아?”

 

“너랑 나만.”

 

“그럼, 됐어. 시작하자.”

 

“그래, 차 사장도 이 쇼가 성공되기를 빌고 있을 거다.”

 

진국과 봉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픈 시간은 되어 가는데 달을 가린 거대한 구름은 느리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까지 속 썩힌다.”

 

약속된 오픈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낮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란제리 쇼는 달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15분 쯤 길고도 긴 시간이 흐르자 달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명 아웃!”

 

진국이 명령했다.

 

홀 안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수군거리던 말소리가 사라졌다.

 

잠시 귀를 뚫을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낮고 가늘게 무반주 음악으로 ‘Moon river’가 흐르기 시작했다.

 

왈츠 풍이었다.

 

홀은 물론 무대 위에 달빛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무대의 전면의 커튼이 천장으로 서서히 올라갔다.

 

그 뒤에 50명의 모델이 한꺼번에 서 있었다.

 

그녀들이 음악에 맞추어 몸을 가볍게 흔들며 서서히 무대 중앙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달빛은 모델들이 입고 있는 ‘레드 문’에 부딪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유두도 보이고 거웃도 드러나는 속옷들도 있었지만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빛이 적나라함을 살짝 감추고 있었다.

 

관람하던 관객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하나 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통념을 부숴 버린 란제리 쇼였다.

 

하나씩 모델이 밝은 조명에 등장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달빛에 의지해서 등장하는 쇼였다.

 

무대 위에는 50개의 빨갛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자들이 밤의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들은 관람석 깊숙이 이어진 넓은 무대를 따라 천천히 그러면서도 육감적으로 걸어 나왔다.

 

 

6.

 

 

란제리 쇼인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델들이 입고 있는 속옷은 섹시하지만 절대로 천박하지 않았고

 

그녀들의 걸음걸이 또한 육감적이지만 절대로 경박하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가슴이 흔들리면 브래지어가 붉게 빛났고

 

다리를 옮길 때마다 팬티가 황금빛으로 빛을 냈다.

 

유두가 보이고 모델들의 거웃이 드러났지만 역시 천박하지 않았다.

 

그녀들을 쳐다보는 관객의 눈빛이 어둠 속의 호랑이 눈처럼 빛났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환호성은 스카이 라운지를 가득 메우고 넘쳐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내내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강 일환의 입이 벌어졌고 꼬장꼬장한 황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델들의 선두엔 에이꼬가 서 있었다.

 

“중국, 아니 세계 최고의 브랜드가 되겠어요.”

 

주해원이 진국에게 다가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진국의 가슴도 벅찼다.

 

리허설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자살한 차 몽현 때문에 슬프기도 했다.

 

진국은 눈물을 흘렸다.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모델들은 객석 사이사이를 누비고 다니다가 다시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아침의 꽃처럼 피었다가 저녁의 꽃처럼 오므라드는 그런 형식이었다.

 

홀 안은 삽시간에 열기로 달아올랐다.

 

모델들의 열정과 그들을 보는 관객의 열정이 어우러져 홀은 뜨거운 도가니 안 같았다.

 

“진국아. 성공이다. 성공!”

 

봉수가 진국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곁에 공정혜와 병달 그리고 마평수와 주해원이 서 있었다.

 

모델들 중앙에 있는 이가성과 왕조선이 보였다.

 

그녀들은 가슴을 앞으로 잔뜩 내밀고 자신감을 보였다.

 

‘레드 문’을 입는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는 포즈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금무대하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는 란제리 쇼 행사장이 아니라

 

한편의 이벤트 연극 행사장처럼 여겨졌다.

 

관객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낯선 언어들의 감탄사도 들려왔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각 나라의 유명 속옷 브랜드 점장들도 초청했던 것이었다.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한 광경에 관객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50명의 모델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한 명이 길게 앞으로 걸어갔다가 무리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한 명이 나오는 방식의 두 번째 액션이 시작되었다.

 

1명이 핀 조명에 집중적인 스포트를 받으며 무대를 돌 때 나머지 49명은 무대에서

 

그대로 음악에 맞추어 가볍게 춤을 추었다.

 

오로지 달빛에만 의지해서 말이다.

 

봉수가 진국이 손을 잡았다.

 

진국은 주해원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다시 병달의 손을 잡았다.

 

병달은 공정혜의 손을 그리고 공정혜는 마평수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뜨거운 열정과 감동이 전달되었다.

 

진국은 무대를 지휘하는 에이꼬를 쳐다보았다.

 

진국은 문득 그녀가 자신의 평생 반려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무대 위의 에이꼬와 진국의 눈이 부딪혔다.

 

에이꼬가 진국에게 보일 듯 말 듯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국은 비로소 삶의 흔적 하나는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진국은 마음속으로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진국의 그 뜻이 모두에게 전달되었던 것일까?

 

그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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