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8장 변태기 20

오늘의 쉼터 2015. 5. 2. 15:18

제8장 변태기 20 

 

 

1.

 

그래도 긴장을 한 탓인지 진국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술자리가 얼마만이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주해원이 술잔을 들며 넋두리하듯 읊조렸다.

 

“그러게, 꽤 됐다. 그 동안 연락도 못하고 정말 미안해.”

 

채연이 술잔을 들고 홀짝 비웠다.

 

주해원이 소주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채연과 진국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주해원은 진국을 가운데 두고 진국의 오른편에 앉았다.

 

채연이 몸을 앞으로 내밀어 주해원을 멀뚱 쳐다보았다.

 

진국은 더욱 바짝 긴장이 됐다.

 

“저기를 봐!”

 

주해원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처음 사무실로 들어설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창은 넓은 통 유리였다.

 

창밖에는 25층 짜리 건물이 우뚝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사무실 군데군데 불을 밝힌 건물은 이정표처럼 떠 있었다.

 

눈은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진국은 황 사장 집 앞에 죽치고 있을 차 사장과 박춘만 실장이 걱정되었다.

 

주해원과 이렇게 한가롭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는 저 건물을 사들일 거야.”

 

주해원의 말이 진국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채연이 몸을 앞으로 내민 채 그런 주해원을 쳐다보았다.

 

채연의 눈을 보니 예전에는 서로 그런 말들을 나눈 적이 없는 듯했다.

 

진국은 귀밑에서 턱 아래까지 난 주해원의 상처를 훔쳐보았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그 상처가 꿈틀거렸다.

 

“그래, 저런 건물 하나 사면 평생 놀고먹으며 살 수 있겠다.”

 

“난 그러려고 저 건물을 사들이려는 건 아냐.”

 

주해원의 목소리가 딱딱하고 차갑게 울려 퍼졌다.

 

“그럼?”

 

진국은 조바심이 일었다.

 

“내 상처의 원흉!”

 

주해원이 귀밑에서 턱 아래까지 이어진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그게 저 건물이랑 무슨 상관 있어?”

 

“저 건물을 사들인 놈이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이거든.”

 

주해원은 남의 이야기하듯 쉽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진국은 그녀의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들렸다.

 

주해원은 술을 들이킨 후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로 인해 그녀의 몸이 느슨해진 탓일까?

 

주해원의 허벅지가 진국의 허벅지에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진국에게 전해졌다.

 

진국은 채연과 주해원의 사이에 앉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5년쯤 전 너한테 한동안 연락 못했던 적이 있었잖아.

 

그때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채를 썼었지.

 

아빠랑 엄마랑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고 낸 놈이 뺑소니를 쳤거든.”

 

“그래, 친구들한테 들었던 적 있었어.”

 

몸을 앞으로 내밀었던 채연도 소파 등받이 깊숙히 몸을 묻었다.

 

“아빠랑 엄마랑 차라리 그때 바로 죽었으면 내가 사채를 얻어 쓸 일이 없었을 지도 몰라.

 

스튜어디스 그만두고 퇴직금이랑 그 동안 모은 돈도 모두 꼴아 박았는데도

 

 아빠랑 엄마랑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난 혼자잖아. 어떡하든 아빠랑 엄마를 살려야만 했어.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말야. 아무튼 난 그때 모든 걸 다 잃었어.

 

심지어 내 순결까지도. 사채를 얻어 쓰며 몸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썼었거든.”

 

“그런데 상처는?”

 

채연이 묻자 주해원이 허탈한 듯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더 마셨다.

 

 

2.


"사채를 갚지 못하는 대신 내게 돈 빌려준 놈의 정부가 되어야만 했지.

 

아빠랑 엄마도 살리지 못했는데 말야.

 

나는 저 놈한테서 도망 다니기 시작했어. 그러다 이렇게 된 거야.”


주해원이 옆으로 돌려 앉았다.

 

턱밑의 상처가 굵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럼, 황 사장은?”

 

채연은 자신이 죄라도 지은 듯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작자가 나를 사채업자들 모임에 데리고 나갔는데 그때 나를 보셨지.

 

그리곤 내 빚은 갚아주셨어.

 

난 이유를 아직도 몰라.

 

나를 거두셨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하셨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진국은 주해원이 살아온 내력이나 듣고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그녀의 삶이 불쌍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삶을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왜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지 아니?”

 

이번에는 주해원이 몸을 앞으로 내밀어 채연을 건너다보았다.

 

이런 자리에 나를 왜 불렀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진국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오늘이……. 네 생일이었구나.”

 

“잊지 않고 있었네.”

 

주해원이 미소를 지었다.

 

반면 채연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선물을 준비 못했네.”

 

“괜찮아. 진국씨랑 같이 왔으니까.”

 

진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해원의 사무실로 오기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진국은 갈증이 일었다.

 

술잔을 들어 홀짝 비웠다.

 

감질만 났다.

 

진국은 소주병을 들어 제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도 뭔가 해주고 싶은데?”

 

“그럼, 너를 줘.”

 

주해원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진국과 채연 앞으로 나와 섰다.

 

채연과 진국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 사귀는 사람 있는 거 알잖아.”

 

“오늘 하루만 아니 오늘밤만.”

 

진국은 두 여자 사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주해원이 무릎을 진국의 다리 사이로 찔러 넣었다.

 

무릎 하나는 채연의 다리 사이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진국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있었다.

 

“그럼 네가 진국씨에게 줄 수 있는 게 뭔데?”

 

채연이 각오를 하기라도 한 듯 주해원을 올려다보았다.

 

“장담할 수는 없어. 다만 사장님은 내 결정을 한번도 반대하신 적이 없었어.”

 

진국은 순간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주해원을 잡으면 ‘코지’를 구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채연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채연과 주해원은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진국은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몰랐다.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은 바로 진국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도망간다는 게 우스웠다.

 

두 여자는 어느새 허리를 굽혀 바지를 벗고 브래지어도 풀어버렸다.

 

채연은 T자형 속옷을 입고 있었고 주해원은 몸에 착 달라붙어 위로 바짝 올라간

 

사각의 속옷을 입고 있었다.

 

주해원이 진국에게 채연을 거들먹거린 건 이런 자리를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던 모양이었다.

 

진국은 슬그머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채연의 손과 주해원의 손이 동시에 진국의 팔을 잡았다.

 


3.


“난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진국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인간은 때때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알 수 없는 열정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거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분위기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두 여자는 진국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두 여자의 섹스에 끼어 들기도 난감했다.

 

진국은 다리에 힘을 준 채 엉거주춤 선 채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뜨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채연이 손이 진국의 점퍼를 벗겼고 주해원의 손이 진국의 바지 혁대를 풀렀다.

 

그 손길을 막는다는 게 더 이상할 듯 싶어 진국은 두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주해원은 진국과 채연의 손을 잡고 다른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진국이 열심히 두드렸던 방이었다.

 

방은 사무실과 달리 깔끔하고 현대적이었다.

 

뒷편에 허리쯤 높이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그 뒤가 주해원의 침실인 모양이었다.

 

“내가 지내는 방이야.”

 

주해원은 진국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세 사람은 속옷 한 장씩만 걸친 채 주해원의 방 한 가운데에 섰다.

 

그 방에서도 주해원이 말한 건물이 훤히 내다보였다.

 

주해원은 채연과 진국을 침대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침대는 흰 시트 커버가 주름 하나 없이 씌워져 있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진국은 ‘코지’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채연은 그 동안 소홀했던 친구의 삶을 위로하고

 

진국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주해원은 그 동안 고통받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온

 

삶을 위로 받겠다는 심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있었어.

 

너랑 나랑 어떤 남자와 이렇게 셋이 한 침대에 누워 있을 거라는 걸 말야.

 

그 남자가 진국씨가 되고 말았지.”

 

주해원은 꿈을 꾸듯 말했다.

 

“채연아, 나는 말야. 13살 때 첫 경험을 했어. 이때부터 나는 주체할 수가 없었어.

 

항공사에서 일할 때에도 나를 원하는 남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았지.

 

그런데 아빠랑 엄마를 잃은 뒤에는 오로지 너만 생각이 나는 거야.”

 

“왜 너희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연락하지 않았니?”

 

“누군가에게 전화 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특히 너에겐 말이지.”

 

주해원이 가운데 누워 있는 진국의 몸 위를 지나 채연에게 다가갔다.

 

채연이 눈을 감았다.

 

진국은 두 여자의 아래에 누워 그녀들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주해원의 가슴이 조금 작았지만 더 희고 유두는 더욱 붉었다.

 

주해원이 채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 기이한 섹스를 진국은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해원의 한 손은 채연의 가슴을 찾아 쥐었고 다른 한 손은 진국의 속옷 사이로 물처럼 스며들었다.

 

채연의 한 손은 진국의 가슴을 어루만졌고 다른 한 손은 주해원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어이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진국의 아랫도리를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두 여자의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채연과 주해원은 서로에게 남은 마지막 속옷을 벗겨주었다.

 

그 사이 진국은 슬그머니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두 여자는 이제 진국의 존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해원은 채연을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목에, 가슴에, 배에. 주해원의 몸부림에 박자를 맞추듯 채연이 가쁜 숨을 토해냈다.

 

어느 순간 주해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진국은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 속옷을 찾아 조용히 입었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또한 이 두 여자를 이용해 회사를 살리겠다는 생각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진국은 소리 없이 주해원의 침실에서 빠져 나왔다.

 

진국은 열린 문틈으로 두 여자의 섹스를 구경했다.

 

채연이 주해원의 가슴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추하지 않고 아름다워 보였다.

 

진국은 돌아섰다. 황 사장을 만나기 위해 편법을 쓰려고 했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주해원은 채연을 만나기 위해 진국을 이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국은 소리나지 않게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사무실 문을 닫을 때까지 두 여자의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진국은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담배를 꺼내 물고 깊게 한숨 빨아들였다.

 

늘 옳은 길만 걸어왔던 자신이 오늘은 추하게 여겨졌다.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주해원에게 몸을 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진국은 담배를 복도 바닥에 떨어트린 후 발로 비벼 껐다.

 

“이건 아니다.”

 

진국은 건물에서 나왔다.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퍼부었다.

 

거리는 눈길로 변해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갔다.

 

진국은 운전대를 바짝 잡고 조심스럽게 독산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인도는 백지를 덮어놓은 듯 하얗다.

 

황 사장의 집으로 오르는 언덕길에서는 차가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길이 미끄러웠다.

 

진국은 차를 길가에 주차시킨 후 간이 천막을 들고 내렸다.

 

걸어 올라가는 길도 미끄러웠다.

 

하지만 진국은 황 사장의 집 앞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몇 차례 넘어지고 자빠진 후에야 황 사장의 집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천막을 깔아놓았던 자리엔 눈만 잔뜩 쌓여 있었다.

 

“사장님.”

 

그때 눈 덮인 바닥이 꿈틀거렸다.

 

두 개의 침낭이 나타났다.

 

지퍼가 열린 후 박춘만 실장과 차 사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어디 가서 눈이라도 피하시죠.”

 

진국은 텐트를 내려놓고 침낭을 덮은 눈들을 손으로 쓸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독한 황 사장을 만나려고 하는 건데 우리도 지독해져야 하지 않겠어요.”

 

차 사장이 허탈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디 잠깐 눈 좀 피하고 오자고 해도 사장님께서 막무가내시라

 

어쩔 수 없이 침낭 뒤집어쓰고 있었던 거네. 그런데 생각보다 따뜻하고 좋네.”

 

침낭을 털던 박춘만 실장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 빛 같은 웃음들이었다.

 

진국은 서둘러 간이 천막을 펼쳤다.

 

바닥에 쌓인 눈도 치웠다.

 

“이제는 차에 들어가셔서 좀 쉬세요.”

 

“그렇게 나쁘지 않네요.”

 

그나마 눈이 내려 그런지 바람만 불 때와는 달리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진국은 중심에 돌을 쌓은 후 숯을 지폈다.

 

근처에 있는 마른나무 가지들을 꺾어 제법 모닥불 같은 불길을 만들었다.

 

세 사람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내일은 몇 사람 빼고는 다 출근하지 않을 겁니다.”

 

박춘만 실장이 언제 사왔는지 모를 쥐포를 꺼내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조 팀장 오면 한잔하려고 쥐포하고 땅콩하고 좀 사왔어.”

 

박춘만은 봉투를 뒤져 소주와 종이컵을 꺼냈다.

 

“만약 우리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도망갔던 직원들은 일체 다시 받아들이지 말기로 합시다.”

 

박춘만이 술잔을 돌리며 이를 앙 다물며 말했다.

 

추위를 이기는 데에는 역시 술 만한 것이 없었다.

 

진국은 주해원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5.


“우리도 내일까지만 기다려보고 황 사장이 안 나타나면 철수합시다.”


차 사장이 술잔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침낭을 목까지 끌어올린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이왕에 시작한 적어도 마지막 날 4시까지는 기다려 봐야죠.”

 

“그려, 이왕에 시작한 거.”

 

박춘만은 진국의 뜻에 동조를 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허름하지만 제 오피스텔 보증금 빼면 남은 직원들 ?s 푼은 나눠줄 수 있을 겁니다. 그

 

 오피스텔은 다행이 돌아가신 어머니 명의거든요.

 

그러니 이렇게 사서 고생 안 하셔도 됩니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고 그리고 문화가 변했다지만

 

신뢰라는 건 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회사가 그 동안 엉뚱하게도 땅이나 사들이고 문어발식으로 되지도 않을 사업 늘리고

 

돈 된다고 두부나 콩나물까지 팔아먹는 기업이었다면 저도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을 겁니다.

 

‘코지’는 한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었습니다.

 

성실하게 일했고 일한 만큼의 대가만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코지’ 같은 기업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국은 서서히 술기운이 도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차 사장과 박춘만에게 자신의 뜻을 피력한 것이었다.

 

주해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 것도 옳게 가야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 말이 맞아. 아, 우리야 뭐 어디 한 눈 판 적 있나? 돈이 된다 싶으면

 

여기저기 손 뻗어서 중소기업들 다 죽이는 그런 짓 하는 기업들 천지야.

 

나중에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문제가 되면 공적자금이나 받아 처먹고 말야. 오성도……”

 

박춘만이 차 사장의 눈치를 봤다.

 

“실장님, 이 마당에 제 눈치를 볼 게 뭐 있습니까?

 

저는 애초 오성하고는 관계가 없는 놈이었습니다.

 

잘못 태어난 놈이니까요.”

 

“사장님도 참.”

 

박춘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진국은 숯불 위에 나뭇가지를 더 얹었다.

 

“사장님, 이번에 ‘코지’를 못 살린다고 해서 기 죽을 거 없습니다. 까짓 거 다시 시작하죠.”

 

박춘만은 그렇게 늘 낙천적이었다.

 

 ‘코지’가 최종 부도처리되면 차 사장의 구속은 불 보듯 뻔했다.

 

비록 2, 3개월 후에 나온다지만 그럴 경우 차 사장의 감성으로 재기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끼리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어떤 사업이든지 새롭게 시작을 하면 3년은 이익 보기가 힘든 게 요즘 세상이었다.

 

그러니 중국에서는 몇 년을, 얼마를 투자해야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네가 그 회사를 그만두고 차라리 사업을 시작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진국은 양어머니인 신 회장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단 한번도 신 회장의 말을 되새겨보지 않았던 진국이었다.

 

진국 스스로도 지금 절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박춘만이 차 사장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를 때 날벼락처럼 뭔가가 천막 위로 떨어지며 천막이 푹 꺼졌다.

 

“뭐야?”

 

박춘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차례 뭔가가 천막 위로 떨어졌다.

 

진국과 차 사장 그리고 박춘만이 후닥닥 천막 밖으로 나왔다.

 

황 사장의 집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넘어와 천막을 덮치고 있었다.

 

그건 채 꺼지지 않은 연탄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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