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8장 변태기 17

오늘의 쉼터 2015. 4. 30. 22:03

제8장 변태기 17 

 

 

1.


진국은 황녹주와 통화를 끝낸 후 차 사장의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그가 챙겨 놓은 짐을 들고 내려와 차에 싣고 다시 황 사장의 집으로 향했다.


“조 팀장, 설마 했는데 황 사장 집 앞에서 먹고 자고 하겠다고 생각한 겁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양반 밖에 우릴 구해 줄 사람이 없다구요.”

 

차 사장의 얼굴은 창백했다.

 

진국은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차 사장 같은 물오너의 어떤 면을 보고 황 사장이 돈을 빌려주었던 것이란 말인가.

 

오성의 막내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황 사장 정도라면 오성과 차 사장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사장님,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런 심정이지만 이런 방법으로 그 양반이 우리 사정을 봐줄까 싶습니다.

 

하루만 이자가 늦어도 회사로 찾아와 난리를 피우던 분이었습니다.

 

시간 단위까지 계산해서 이자를 받아갔던 분이기도 하죠.

 

아버지도 혀를 내두르는 양반입니다.”

 

“아버지라면……. 오성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진 않지만 엄연히 아버지는 아버지이죠.”

 

“끝이 안보이고 두렵기조차 한 거대한 댐이 바늘구멍 하나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 황 사장을 찌를 바늘이 되기 위해 가는 겁니까?”

 

진국은 이 와중에도 농담을 하는 차 사장이 싫지 않았다.

 

“그래요, 가 봅시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이 뭐든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조 팀장, 나중에라도 우리 직원들이 묻게 된다면

 

나도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사장님, 그런 말을 뭐하러 하십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제 뜻을 알아 달라는 겁니다.”

 

진국은 차 사장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마른손이었다.

 

차 사장은 이목구비가 시원한 얼굴도 아니었다.

 

귀가 크다거나 코가 유독 큰 편도 아니었다.

 

진국이 알고 있는 짧은 관상학으로 보자면

 

차 사장은 사업가로 클 재목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황 사장이 그런 걸 몰랐을까?

 

진국의 차는 어느새 황 사장의 집 앞에 도착을 했다.

 

막다른 길의 끝에 있는 집이라 황 사장의 집 너머로 다니는 차나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진국은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대문도 두드리고 황 사장을 불러보기도 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진국은 황 사장의 집 앞에 파란색 포장지를 깔았다.

 

그 위에 이불을 깔고 좌식 책상을 펼쳤다.

 

“저는 중국으로 돌아가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일을 해야 하거든요.”

 

진국은 뒷좌석에 실려있는 서류들과 노트북을 꺼냈다.

 

“그럼, 나는 뭘 할까요?”

 

손님과 주인이 뒤바뀐 형국이었다.

 

어쩌면 의지를 잃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대리점과 총판을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부터 황 사장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할 때까지 여기가 사무실입니다.

 

여기서 먹고 자고 외부 업무 보고 그럴 겁니다.

 

하실 수 있겠죠?”

 

몸은 벌써 부들부들 떨려왔다.

 

30년만의 혹한이 다시 찾아왔다고 떠들어댈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더군다나 황 사장의 집은 언덕 끝이라 바람까지 매서웠다.

 

“해야죠.”

 

“그럼, 총판하고 대리점 하시는 분들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시면 될 듯 합니다.”

 


2

 

진국은 차 사장 책상 위에 노트북을 켜주었다.


“그럼, 회사 사람들도 이리로 다녀야겠군요.”

 

“그래야죠.

 

우선 부산이랑 광주 그리고 대구랑 인천 쪽 총판 쪽 이사님들을 설득해야할 겁니다.

 

우리 둘만으로는 힘드니까 박춘만 과장님도 부르겠습니다.”

 

진국은 서류들을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쳤다.

 

빚과 자산을 비롯해 ‘코지’ 창립 후 그 동안 거래되었던 원 거래 장부였다.

 

담당자가 바뀌고 혹은 협력업체의 어떤 사정으로 한 동안 거래대금을

 

주지 못하거나 받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옛날 장부까지 들추게 된 것이다.

 

장부를 뒤적이다 보면 물론 줘야할 돈도 있겠지만 진국의 우선 목적은

 

받아야 할 돈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후에 ‘코지’가 성장하면 그땐 모른척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여력도 없었다.

 

진국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봉수였다.

 

“어떻게 일은 잘 되고 있어?”

 

진국은 차 사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은 뭐라고 말할 단계가 아니다. 삼일 쯤 후에 전화할게. 그쪽은 어때?”

 

“꽤 괜찮은 디자인들 나오기 시작했어.

 

공정혜씨가 눈에 불을 밝히고 우리들을 채찍질하는 바람에 뭐가 되도 되겠더라.

 

그리고 호 회장이 소개해준 모델 분들로 매우 열성적으로 우릴 도와주고 있고.

 

다만 경비 때문에 먹는 게 좀 부실한 게 문제라면 문제지 뭐.”

 

“조금만 더 버텨야지 어떡하겠냐.”

 

“그런데 너 떨고 있냐?”

 

“무슨 소리야?”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다 들린다.”

 

진국은 턱을 잡았다. 정말로 자신도 모르게 덜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 한국은 30년만의 추위란다.

 

내가 지금 밖에서 전화를 걸어서 그래. 아무튼 수고해라.”

 

“며칠 있다가 디자인 샘플 한번 보내줄게.”

 

“알았어.”

 

“채연씨랑 송림 선배 같은 사람들한테 부탁하면 잘 봐줄 거다.”

 

나송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강 이사와 붙어서 ‘비라’로 스카웃 되어 간 김중경과 한때 동거를 했다는 여자.

 

진국은 오래 전에 채연을 마음에 품고 그녀를 만났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 늘 송림이 있었다.

 

채연을 통하면 송림을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수와의 통화가 끝났다.

 

차 사장은 침낭까지 뒤집어 쓴 채 노트북 화면에 몰두해 있었다.

 

진국 역시 침낭을 뒤집어쓰고 서류를 뒤적였다.

 

“라면 좀 있을까요?”

 

“컵 라면 한 열 개쯤 있습니다.”

 

차 사장이 종이 박스를 가리켰다.

 

진국은 브루스타를 꺼낸 후 물을 찾았다.

 

“저 다른 박스에 물이랑 소주랑 양주까지 다 챙겨 왔습니다.”

 

진국은 차 사장이 말한 박스를 뒤졌다.

 

술병들은 에어 캡으로 꼼꼼하게 싸서 포장을 해놓은 상태였다.

 

진국은 차 사장의 그런 준비성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밥이 없군요. 며칠을 버텨야할 지 모르는데. 손 난로도 있으면 좋겠고.

 

아무래도 한번 내려갔다 와야겠습니다.”

 

진국이 자동차 키를 꺼낸 후 자동차로 다가갔다.

 

“조 팀장 없을 때 황 사장이 나타나면 뭐라고 말하죠?”

 

차 사장은 진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3


진국은 차 사장이 준비해 온 종이 상자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차 사장과 꼼꼼함이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무조건 봐달라고 말씀하세요. 아마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러겠죠. 다녀오십시오.”

 

“두 시간 후면 박춘만 실장이 올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않는 게 좋겠는데.”

 

“박춘만 실장님께만 말해 놓았습니다.”

 

&차 사장은 노트북에 얼굴을 박은 채 진국을 쳐다보지 않았다.

 

진국은 박춘만 실장이 회사의 어느 누구보다 신뢰가 가는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우직했으며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먼저 남을 배려하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의 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큰 아이의 심장병 때문에 어렵게 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한번도 토로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봉수와 함께 술에 취한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진국은 차를 끌고 언덕길을 내려왔다.

 

차안에서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칼바람 소리가 들렸다.

 

한 겨울 남의 집 대문 앞에 앉아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진국은 믿고 싶었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진국은 시장 입구에 차를 세운 후 골목으로 들어갔다.

 

데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밥을 열 개 사고 장아찌와 김치 등도 샀다.

 

고기를 굽는 숯이 보여 모닥불 겸으로 숯도 몇 개 장만했다.

 

만물상에 들어가 손 난로도 준비했다.

 

이제 지갑도 텅 비고 말았다.

 

“정말로 거지 신세네.”

 

진국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국이 차를 몰고 돌아와 보니

 

차 사장은 면벽한 채 참선에 들어간 스님처럼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진국은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밥을 데우고 김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라면 드시죠.”

 

“저 때문에 조 팀장까지 고생입니다.”

 

차 사장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하다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잃을 것도 없는 데 기까지 죽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진국은 차 사장을 위로했다.

 

“사실 난 오너 자질은 부족한 거 같아요.”

 

진국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든 정상화가 되면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겨야겠어요.”

 

“강 이사 같은 사람 말입니까? 차라리 사장님께서 계속 맡는 게 낫습니다.”

 

“강 이사는 잘 있을까요?”

 

차 사장은 젓가락을 들고 김치를 뒤적였다.

 

“원래 나쁜 놈들은 잘 있는 법입니다. 드시죠. 라면 불겠습니다.”

 

진국이 막 젓가락을 라면 담긴 사발에 밀어 넣으려고 할 때 대문이 삐그덕 열렸다.

 

개량 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대문을 나오면서 깜짝 놀랬다.

 

하지만 뭐라고 묻지는 않았다.

 

그 남자는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종종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황 사장과 같이 다니던 젊은이라 나랑은 안면이 있어요.”

 

“어쨌든 황 사장이 알게 되긴 하겠군요.”

 

“그런 셈이 되네요.”

 


4.


“그런데 저런 친구들이 황 사장을 보좌합니까?”


좀 전에 진국의 앞을 지나간 젊은이는 대학생처럼 보인 때문이었다.

 

“황 사장의 측근으로 두 명쯤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국은 황 사장을 만나지 못한다면 일단은 그 주변 인물들부터 만나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억나거나 아는 사람 있습니까?”

 

“좀 전에 내려간 친구를 황 사장이 도수라고 불렀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감색으로 물든인 도포를 입고 다니는 철주라는 사람이 하나 있고

 

대외적인 서류작성이나 사람들 만나는 일은 월명이라는 사람이 하고

 

또 한 명은 여잔데 해원이라고 불렀던 거 같습니다.

 

황 사장이 큰 일로 움직일 때 이들이 같이 움직이는 모양이더라구요.”

 

“다 보셨습니까?”

 

“제가 자금을 끌어들일 때랑 우리 회사로 최후 통첩을 하러 왔을 때 봤지요.”

 

진국은 차 사장이 말한 이름들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도수, 철주, 월명, 해원. 이름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았다.

 

“연락처 가지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진국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차 사장에게 물었다.

 

차 사장은 자신의 집에서 들고 나온 서류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차 사장이 진국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원산 실업 - 주해원. 연락처 ……’

 

진국은 명함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저도 그 여자한테 연락 많이 했습니다.

 

황 사장보다 더한 여잡니다.

 

그러니까 황 사장 밑에 붙어 있겠지만 말입니다.

 

소문에는 황 사장의 애첩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차 사장은 황 사장 집 앞에 자리를 잡은 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국과 차 사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라면이 퉁퉁 불고 말았다.

 

두 사람은 라면을 먹었다.

 

세상의 그 어떤 음식보다 달고 맛있었다.

 

라면을 즐겨 먹지 않던 진국에게도 퉁퉁 불은 이 라면만은 꿀맛이었다.

 

“라면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몰랐습니다.”

 

차 사장은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웠다.

 

해질 무렵 박춘만 실장이 왔다.

 

“아이고, 사장님, 이게 무슨 난립니까?”

 

박춘만은 허겁지겁 달려와 차 사장과 진국의 손을 잡았다.

 

진국은 귀국해서 그를 만나지 못한 터라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애들은 건강하지요?”

 

“조금 나아졌지 뭐.”

 

세 남자가 이불을 덮고 바닥에 앉았다.

 

이제 해는 서편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더 이상 업무를 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황 사장 집의 처마에 밝혀 놓은 등이 켜졌다.

 

불은 밝혀졌지만 추위는 어쩔 수 없었다.

 

파카 점퍼를 입고 이불을 덮고 앉아 있었지만 추위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박춘만의 얼굴이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회사 분위기는 어때요?”

 

“뭐, 찬바람 쌩쌩 불죠.

 

복도에 나가보면 서로 어디로 가야하는 지 수군댑니다.

 

예전에는 나를 보면 하던 말도 멈췄는데 이제는 대놓고 이야기들 하죠.”

 

박춘만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차 사장의 고개를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

 

“잠은 어쩌구요?”

 

“차에서 자면 됩니다.”

 


5.


"몇 시까지 이러고 있을 작정입니까?”


박춘만이 차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차 사장은 진국을 바라보았다.

 

“황 사장 집의 불이 꺼지면 차에 들어가 자야겠죠.”

 

“황 사장 얼굴을 보기는 봤습니까?”

 

차 사장이 고개를 맥없이 가로 저었다.

 

박춘만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뽀얀 담배연기가 가로등 불빛에 젖어 귤껍질 색으로 물들었다.

 

“추워서 견딜 수나 있겠습니까?”

 

박춘만의 말에 차 사장이 종이 상자를 뒤져 양주를 꺼내왔다.

 

“러시아나 북 유럽 쪽에 사는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이유를 알 거 같습니다그려.”

 

박춘만은 살림도구를 뒤져 밥그릇 세 개를 꺼냈다.

 

차 사장이 말없이 술을 따랐다.

 

진국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한 모금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싸늘하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뱃속에 퍼져나갔다.

 

“저는 일단 해원이라는 이 여자를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실장님은?”

 

“아, 사장님이 여기에 계시는데 나도 있어야죠.”

 

“집에 안 들어가셔도 되겠습니까?”

 

“참말로 나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닙니다.

 

그리고 집이야 언제든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춘만이 코트 깃을 잔뜩 세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일하는 데 지장이 있으면 안됩니다.

 

홈쇼핑 쪽을 2월까지 계약이잖아요.”

 

“그 놈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죠.

 

벌써부터 강짜 놓기 시작합니다.

 

권 피디라는 놈은 아예 대놓고 방송하려거든 얼마를 달라고 할 정도니까요.

 

벼룩에 간을 빼 먹을 놈입니다.”

 

박춘만이 홀짝 밥그릇에 담긴 술을 비웠다.

 

“젠장, 꼭 나 대학 입학하고 그해 겨울 노가다판에서 살 때 생각이 나네요.”

 

“노가다 판에서 살다뇨?”

 

“대학 입학하고 정릉에 있던 친척집에서 당분간 묵기로 하고 찾아 갔었죠.

 

그런데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딸랑 있는 달동네지 뭡니까?

 

그 양반 그 동안 고향에 와서 허풍만 떨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날로 가방 짊어지고 나왔죠.

 

갈 곳은 없고 그래서 공사중인 다가구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소주 한 병 사다놓고 신문지 덮고 잤죠.

 

그게 인연이 되어서 그날부터 그 공사판에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놈이라니까 거기 아저씨들이 나를 챙겨준 거죠.

 

그땐 그래도 그런 정들이 남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데서 자면 자재 훔치러 온 도둑놈 취급할 겁니다.

 

불과 20년 전인데 사람들이 너무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국은 황 사장의 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희망처럼 희미한 불빛이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다.

 

주해원을 만나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약국에서 쌍화탕이라도 한 박스 사서 들고 가야겠는데 주머니엔 동전까지 합쳐 몇 천원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차 사장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조 팀장 돈 없어?”

 

박춘만이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났다.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박춘만이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만 원 짜리 몇 장을 꺼내 진국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나저나 오늘밤부터 눈이 온다는데 어쩌지.”

 

그때 담장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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