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마지막 눈물-3
더블 침대가 놓인 안방 같은 방에 두 남자가 옷을 입은 채로 누워 있었다.
윌리엄과 에릭이 키스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유미는 처음에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취하니까 헛것이 다 보이네. 하지만 그게 헛것이 아니란 걸 알고는 유미는 황급히 물러났다.
방으로 돌아온 유미가 잠시 혼란에 빠져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릭이었다.
“놀랐다면 미안해요.”
유미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에릭이 다른 남자들과 달리 끈적대지 않고 그토록 쿨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하지만 왜 그런 눈치를 못챘을까.
그저 남자들이라면 다 자신에게 껄떡대리라고 생각한 오만함과 자신감에 된통
한 방을 먹은 자괴감 때문에 화가 났다.
그야말로 쪽팔려서 온몸의 피가 솟구치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늘 저를 초대한 게, 그러니까….”
“사실 당신에게 좀 끌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윌리엄과 난 5년째 부부처럼 살아오고 있어요.
서로 미묘한 줄다리기 할 거 없이 사업파트너로 쿨하게 만나는 게
더 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난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
물론 대가는 합리적으로 계산해야겠죠.”
“그럼 왜 내가 아버지와 결혼하는 걸 그토록 반대하는 거죠?”
“그건 어떤 여자가 되었건, 아버지와 법적으로 맺어지는 여자는 싫으니까.”
유미는 자신이 다니엘의 아내로 법적인 상속인 신분이 되는 걸 에릭이 꺼린다는 걸 알았다.
“역시 돈의 문제군요.”
“그래요. 난 돈이 좋아요. 돈, 정직하잖아요? 복잡하지 않고 정확하고.”
에릭이 씽긋, 웃었다.
“다만 당신이 아버지의 법적 아내가 된다면 나와 협상을 좀 합시다.
우리, 어차피 길게 갈 사업파트너라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죠, 안 그래요?”
“무슨 협상요? 무슨 상속 지분의 문제인가요?”
“역시 당신은 머리가 좀 돌아가는 거 같아.
만약 아버지와 굳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면 내게 먼저 알려줘요.
무엇보다 당신, 사업상 날 무시하진 못할 테죠?”
유미는 교묘하지만 매끈한 에릭의 말에 공격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조용히 한국말로 내뱉었다.
“재수 없어.”
“뭐라고요?”
“글쎄요. 제가 돈의 노예가 아니라면 어쩌죠?”
유미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에릭이 마침내 잘자라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유미는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매끈한 신사의 얼굴 뒤에 숨겨진 냉혈한 게이 사업가의 본색을 지금에야 발견하다니.
숨겨진 크레바스 같은 자신 안의 빈틈에 유미는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이다.
유혹의 전장에서 기운 뺄 일 없이 돈의 논리에 따라서만 일할 수 있다는 게
더 프로다운 거 아닌가?
그래, 돈에는 돈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침대에 옷도 벗지 않고 누운 유미의 눈꼬리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규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남들 앞에서는 슬퍼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면 가슴에 납을 달고 있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인규의 문자를 받고 공항에서 양평으로 달려간 날,
그날은 인규의 생사에 대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
다만 다음 날 잠수부를 동원해 일대를 뒤져보자는 이야기를 마친 후 모두들 귀가했다.
그날 밤, 유미는 베네치아에서 인규와 곤돌라를 타고 있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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