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변태기 6
“너 오랫동안 못했냐?”
진국이 봉수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그래, 아래 달린 게 어디다가 쓰는 물건인지 모를 정도다.”
“내가 저 여자들 한번 붙여줄까?”
“정말?”
봉수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런데 좀 비싸지.”
“비싸다니?”
“저 여자들 고급 콜걸이야.”
봉수는 호텔 로비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두 여자를 쳐다 보았다.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봉수를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콜걸이란 말야?”
“최소한 대학은 졸업했을 거고 외국어 두 세 개 정도는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거야.”
진국이 봉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미련 갖지 마. 내 나중에 병달이랑 마평수씨랑 근사한 데 한번 데려갈게.”
“너 약속한 거다.”
“내가 약속하고 언제 안 지키는 거 봤냐.”
봉수는 여전히 로비에 서 있는 두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맛을 다셨다.
신수정 정도의 미모였지만 왠지 다른 나라의 여자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일단 황포빌딩으로 향했다.
사무실은 제법 꼴을 갖추고 있었다.
야전 침대도 여섯 개를 준비해 놓았고 간단한 취사도구며 부식거리까지 이미 준비를 해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셨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병달이 짐을 정리하다가 손을 털며 다가와 물었다.
“내일로 약속이 미뤄졌어.”
“뭐 그런 경우가 다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을 일찍 돌려보내던가 해야죠.”
현재 상황 때문인지 병달이 작은 일에도 거품을 물었다.
“병달씨, 너무 열내지 말아요. 중국에서 이런 건 다반사니까.”
“다반사라뇨? 아, 약속이란 게 지키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여유를 가져요. 중국 사람들은 조급한 사람보다 여유있는 사람에게 더 우호적이니까.”
병달은 씩씩거렸다.
팀원들은 내일부터 당장 일을 할 수 있게끔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창가 쪽에는 작은 무대 공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무실에 비해 너무 형편없고 초라했다.
비품도 부족했고 책상 또한 낡은 것들이라 지금 팀원들의 처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중국 사람들은 술과 차를 좋아하잖아요.
마무리도 되었고 또 술 한잔 없이 자려니 서럽고 그러니까 한잔 할까요?”
병달이 너스레를 떨었다.
“중국 사람에 대해 잘 아는 놈이 아까는 열을 냈어?”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겠더라구요.”
“오늘 밖에 나가기는 늦었는데…”
“내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 해 왔지요.”
병달이 냉장고에서 팩 소주와 안주를 꺼냈다.
진국과 봉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새로운 날이 밝았다.
네 남자는 아침 일찍부터 공정혜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 ‘코지’의 앞날을 책임 진 사람들 맞아요?”
공정혜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흰 허벅지가 네 남자의 정신을 깨워주었다.
“일단 밥 먹으러 나가요.”
“밥 먹으러 나가지니?”
봉수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중국 사람들은 집에서 아침 밥 안 해먹어요.
다들 거리에서 사 먹지. 그리고 중국에 왔으니까 그들 습관과 문화에 따라 움직여야죠.”
진국과 마평수가 서두르는 공정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진국은 그런 공정혜를 보며 어쩌면 자신이 그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달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해를 등지고 선 공정혜에 눈길이 팔려 있었다.
진국은 병달과 눈길이 마주치자 괜히 미안해졌다.
이른 아침의 남경로는 뽀얀 김으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리를 음식 장사치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매대 앞에 서서 분주하게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진국과 마평수에게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었다.
병달과 공정혜 그리고 봉수는 상해에 온 뒤 처음으로 거리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만만디라고 하지만 이런 중국 사람들 보며 보통 부지런한 게 아닌가 봐요.”
만두 가게 앞에 공정혜가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아침 7시였다.
“공정혜씨 오늘 보기 좋아요.”
병달이 공정혜의 다리를 훑어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거 성희롱이라는 몰라요?”
만두를 입으로 집어넣던 병달이 사례가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공정혜가 부산을 떠는 바람에 새 사무실에서의 첫날은 일찍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팀원들은 일을 나누기 시작했다.
예전에 준비했던 디자인은 무용지물이었으니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했다.
디자인 파트 쪽은 봉수와 공정혜가 맡기로 했다.
제품을 생산해 줄 공장 섭외는 병달의 몫이었고 마평수는
제반 절차와 자금에 대해 담당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진국은 저절로 관리자가 되었다.
사무실 집기를 갖추었다지만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봉수와 공정혜가 집기 마련을 위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차 사장이었다.
“디자이너를 보충해줄까 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국은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지금 현재 인원으로 일단 준비해 보고 더 필요하면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미국인인데 제가 유학 시절에 사귄 친굽니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차 사장의 그런 배려를 마다할 수 없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데 이 삼일만 상해에 가서 컨셉 좀 잡아 달라도 부탁을 해놓은 상탭니다.
그 친구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오늘 들어갔다가 모레는 뉴욕으로 떠나야 하거든요.”
거절할 수 없었다.
진국은 번잡스럽고 공정혜와 봉수의 자존심이 상할 일인 듯 싶어 마다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시간 후 들어온 공정혜와 봉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서 묵어요?”
“호텔을 하나 잡아줘야겠지.”
“그렇다고 아무 호텔이나 잡아 줄 수는 없잖아요.”
마평수는 우선 경비가 걱정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환율 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상해는 달랐다.
물가가 서울과 맞먹었고 어떤 면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기도 했다.
“양쯔 호텔로 합시다.”
“당분간은 경비 조달이 힘들텐데.”
마평수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뭐, 우리가 아껴서 살아야죠.”
공정혜는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끝냈을 때 다시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디자이너가 두 시간 전에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진국과 봉수가 푸동 공항으로 부리나케 마중을 나갔다.
차 사장은 여전히 두서가 없었다.
“차 사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업가 체질은 아닌 거 같아.
아주 치밀해야 하는데 말야. 더군다나 지금 같을 땐 더욱 말이지.”
봉수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국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치밀하고 꼼꼼하면서도 밥먹듯 사람을 배신하는 강 이사와 같은 오너보다는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설프다고 하더라고 인간적인 오너가 진정한 사업가가 아닌가 싶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긴 강 이사 같은 놈들 보다는 차라리 차 사장이 낫지.”
진국과 봉수는 공항 도착 게이트에서 차 사장이 보낸 사람을 기다렸다.
30분 남짓 기다리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봉수는 종이로 적은 안내판을 들었다.
‘로리타’
늘씬한 키에 금발의 여자가 진국과 봉수 앞으로 다가왔다.
진국와 봉수는 깜짝 놀랬다.
그녀는 디자이너라기보다 모델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미모를 갖춘 여자였다.
“미스터 조?”
여자가 봉수를 가리켰다.
진국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악수를 나눈 뒤 여자는 진국과 봉수보다 앞서서 성큼성큼 앞서서 걸어갔다.
“야, 나보다 키가 더 큰 거 같다. 몸매는 정말 빵빵한다. 죽이지 않냐?”
아닌 게 아니라 공항 로비의 남자들이 로리타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미스터 박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 몸매 정말 죽이죠?”
로리타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한국말로 또박또박 말했다.
봉수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제 말은…”
“차 사장이 다른 말은 안한 모양이군요.
제 어머니가 한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국말도 능숙하죠.”
그녀가 살짝 윙크를 했다. 봉수는 고개를 푹 떨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진국은 차 앞에서 괜히 민망했다.
덩치도 크고 화려하고 세련된 여자를 콩알만한 차에 태우려니 미안했다.
로리타는 남자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또각또각 걸어갔다.
주차장에서 진국이 몰고 온 차를 한번 슬쩍 쳐다봤다.
작은 차에도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진국의 승용차는 언뜻 그녀의 옷차림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진국이 리모콘으로 자동차의 잠금 장치를 열었다.
진국이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고 봉수가 조수석 쪽에 섰다.
그런데 로리타는 뒷좌석 쪽의 문 앞에 멀뚱하니 서 있었다.
진국와 봉수가 차에 오른 뒤에도 그녀는 그저 서있기만 했다.
“뭐해? 차 문 열어 줘.”
“털털한 줄 알았더니 공주과 아냐?”
봉수가 투덜대며 부리나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그제야 로리타가 차에 올라탔다.
“땡큐!”
좁은 차안은 금새 그녀의 향기로 가득 찼다.
진국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저런 고급스러운 여자가 과연 초라한 사무실에서
견뎌낼 수 있을까 싶었다.
“먼저 호텔로 모실까요?”
“저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요.
모레를 떠나야 하니까 일단 사무실로 가죠.
먼저 뉴욕에서 유행하고 있는 디자인 몇 가지 스케치 해드려야 할 거 같아요.”
그녀의 말투는 딱딱했다.
봉수는 그녀의 몸매가 빵빵하다고 했던 자신의 말투 때문에 기분이 상해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무실로 가는 동안 로리타는 창 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황포 빌딩 주차장에 도착한 뒤 봉수는 또 한차례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땡큐!”
‘땡큐는 무슨 얼어죽을 땡큐!’
봉수는 겉으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못마땅했다.
세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평수와 공정혜, 병달은 로리타를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여기는…”
진국이 로리타를 소개하려 하자 그녀가 앞으로 불쑥 나섰다.
“정말 작업 환경이 꽝이네요.
이래서 어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겠습니까? 저는 로리타라고 해요.”
“혹시 ‘뉴요커’의 그 로리타이십니까?”
공정혜가 로리타를 알아봤다.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신다는 디자이너 중의 한 분을 만나네요.”
공정혜가 로리타 앞으로 바짝 다가가자 그녀가 살짝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저는 호텔에서 작업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로리타는 아직도 어수선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진국은 그때부터 차 사장이 괜한 일을 추진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 이상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도 없이 홱 돌아섰다.
그녀가 돌아선 자리에 진한 향수 냄새만 남았다.
진국은 혼자 로리타의 뒤를 따라갔다.
진국은 팀원들을 돌아보며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뜻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진국은 차의 뒷문을 열어주고 로리타가 차에 올라탄 뒤 운전석에 탔다.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상전 하나를 모시게 된 꼴이었다.
‘뭐, 이틀만 있으면 간다니까.’
진국은 그나마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쯔 호텔로 들어선 로리타는 그런대로 만족했다는 얼굴이었다.
“제게 필요한 목록들입니다.”
로리타는 필요한 목록들을 적은 메모지를 진국에게 건넸다.
진국은 메모지를 훑어보았다.
그냥 아이디어 하나 건네주는데 준비해 주어야 할 것은 개인사무실을 차릴 정도였다.
“네, 빠른 시간 안에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참, 조수가 한 명 필요합니다.”
‘조수까지.’
진국은 가능한 밝은 얼굴로 그녀를 대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에 조금 짜증이 났다.
마치 진국의 일을 방해하려고 강 이사가 보낸 스파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보다는 남자가 좋아요.
남자의 거친 감각이 필요한 거니까.
조수는 이왕이면 빨리 보내주시면 좋겠어요.”
방문이 닫히기 전 로리타는 윙크까지 하며 진국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네, 알겠습니다.”
진국은 그녀에게 목례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진국은 문에 대고 종주먹을 내질렀다.
“그나 저나 걱정이네. 남자 누굴 오라고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진국 자신밖에 없었다.
진국은 일단 사무실로 돌아갔다.
팀원들이 로리타를 두고 궁시렁대고 있었다.
진국은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필요하다고 말한 목록표를 마평수에게 건네고 조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그렇지 도와주러 온 사람의 자세가 아니잖아.”
병달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별 수 없잖아. 차 사장이 보낸 사람인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봉수 역시 난감한 듯했다.
“그럼 조수는?”
“천상 내가 가야지. 봉수, 너는 오늘 7시에 양쯔호텔에서 약속 있으니까
6시30분까지 양쯔 호텔로 와라.”
진국은 마평수와 함께 로리타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사기 위해
상해신흥도시인 쉬자후이 지역으로 향했다.
그곳엔 컴퓨터 상가들이 모여 있었다.
로리타가 요구한 물건들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위한 도구들이었다.
물건을 사면서 마평수는 연신 지갑을 들어다 보고 또 들어다 보았다.
“마 형, 어차피 나중에 우리가 쓸 거니까 돈에 연연해하지 맙시다.”
“그런데도 괜히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해 떠날 때 이 물건들도 같이 부쳐달라고 하면 어쩌죠?”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뉴욕에 자기가 쓰는 물건들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거야 벼룩의 간을 빼먹는 일이죠.”
진국은 설마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 법.
그래도 진국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로리타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장만하고 나니
차 사장이 가져온 돈이 이제는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남은 돈으로 앞으로 두 달치 사무실 월세를 내고 다섯 명이 먹고 살아야만 했다.
차 사장이 나중에 또 경비를 보내준다면 모를까 남은 돈으로는 턱도 없었다.
진국은 장만한 물건들을 로리타의 방으로 옮겨 일을 할 수 있도록 갖춰주었다.
“선배님, 상당히 미인입니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마평수가 호텔을 나서기 전 농담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