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8장 변태기 3

오늘의 쉼터 2015. 4. 10. 16:59

제8장 변태기 3 

 

 

병달은 의외의 시간이 주어져 즐거웠다.

 

만약 일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공정혜와 이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없을 터였다.


술집은 아담하고 아늑했다.

 

공간 배치도 교묘해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조명 또한 은은했다.

 

‘죽이는데.’

 

허리까지 트인 전통 의상을 입은 여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여 종업원은 늘씬했다.

 

“선배, 나 앞에서 한 눈 팔지 말아요. 나도 한 몸매 하니까.”

 

공정혜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병달의 손등을 꼬집었다.

 

왜 그런지 공정혜가 오늘따라 매우 살갑게 굴었다.

 

병달이 원하던 바였다.

 

경비가 넉넉해서 방을 각자 쓰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랬다면 오늘 밤 어떻게든 공정혜의 옷을 다 벗길 수도 있으련만.

 

“고량주하고 모듬 불만두 주세요.”

 

병달이 공정혜의 눈치를 보며 주문했다.

 

“병달 선배는 중국에 많이 와 봤죠?”

 

공정혜가 병달 앞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테이블이 커서 그런지 그래도 맞은 편에 앉은 상대방이 멀게만 느껴졌다.

 

“테이블이 크고 너무 멀어서 그런지 잘 안들리네요.”

 

“중국에 많이 와 봤냐구요?”

 

공정혜가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병달이 귀를 기울였다.

 

병달은 은근슬쩍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공정혜가 앉아 있는 쪽으로 옮겼다.

 

“이제 좀 거리감도 안 들고 좋네요.”

 

공정혜는 그런 병달을 경계하지 않았다.

 

“뭐라고 물으셨어요?”

 

병달은 능청을 떨었다.

 

공정혜 역시 그런 병달의 속셈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중국에 몇 번이나 와 봤냐구요?”

 

“아, 북경하고 고비 사막에 몇 번 와 봤습니다.”

 

“북경은 이해가 되는데 사막엔 왜요?”

 

“겸손해지려구요.”

 

“겸손이요?”

 

“학교 다닐 때 중국어과 친구들 몇이서 고비 사막 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물론 가이드 있었구요.

 

버스, 낙타도 타고 티베트까지 가는 여행이었어요.

 

낙타를 타고 갈 때 사막 한 복판에 서 있었는데 내 자신이 모래알처럼 여겨지더라구요.

 

아니 모래알보다 못한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공정혜가 손을 턱을 괴고 병달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배, 내가 좋아요?”

 

느닷없이 공정혜가 맹랑하게 물었다.

 

병달은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도, 동료로서 공정혜씨를 좋아하죠.”

 

“피~ 그런 거 말고 여자로서 말이에요.”

 

병달은 물 잔을 들고 물을 들이켰다.

 

그 사이에 여 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내왔다.

 

공정혜는 술병을 들고 병달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일단 건배!”

 

공정혜가 잔을 들었다.

 

첫 잔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식도와 위장이 타는 듯한 맛이었다.

 

병달도 공정혜도 몸서리를 쳤다.

 

“정말 독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 좋아하냐구요?”

 

병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막상 멍석을 깔아 놓으니까 앉지도 못한다는 데 바로 그 꼴이었다.


“조, 좋아해요.”

 

“그럼, 그때 그 아가씨는 어쩌구요.”

 

공정혜도 여러 차례 인화를 본 적이 있었다.

 

병달은 한잔을 더 들이켰다.

 

첫 잔이 힘들지 두잔 째부터는 오히려 더 부드러웠다.

 

“이젠 안 만나요. 내가 원한 게 아니라 그 여자가 스스로를 경계하더라구요.”

 

“음, 그렇담 내가 꿩 대신 닭이에요?”

 

“아, 그런 거 절대로 아닙니다.”

 

병달은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면 다행이구요. 저도 눈치가 백단이에요.

 

병달 선배가 나 쳐다보는 눈빛이 수상하다는 거 알고 있었죠.

 

오늘 일이 틀어진 것도 있긴 있었지만 오빠 생각도 나고

 

내가 또 어리광 부릴만한 선배도 병달 선배밖에 없고…”

 

공정혜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곤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병달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정혜는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병달은 슬그머니 팔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고 어색하게 다독였다.

 

“그냥 다들 불쌍해서요.”

 

병달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말하는 ‘다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거 혹시 내가 엉뚱한 여자 물은 거 아냐?’

 

평소의 공정혜는 이토록 감상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 날인가? 병달은 입맛을 다셨다.

 

“미안해요. 주책맞게 눈물을 다 보이고.”

 

공정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실은 오늘이 오빠 생일이었거든요.

 

몰랐는데 아침부터 엄마가 전화해서 우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슬퍼졌네요.

 

우리 일도 틀어지고 해서 그랬어요.”

 

“아, 사람이 살다 보면 슬플 때도 있고 그런 거지요, 뭘.”

 

병달은 더 이상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놓을 명분이 없어 내려놓으려고 할 즈음

 

뒷좌석에서 이상한 신음이 들려왔다.

 

“병달 선배.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공정혜가 등뒤를 쳐다보았다.

 

천장까지 닿아 있는 건 아니지만 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높은 칸막이가 좌석을 막혀 있었다.

 

두툼한 게 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소리를 막아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어쩐 일인지

 

신음소리는 귀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병달은 헛기침을 했다.

 

“이거 그런 소리 맞죠?”

 

공정혜가 벽 가까이 귀를 댔다.

 

또 한 차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병달도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벽에 귀를 댔다.

 

여자의 신음 소리였다.

 

“중국 여자겠죠?”

 

“신음 소리만 들어서는 모르겠는데요.”

 

공정혜와 병달이 낮게 낄낄거리며 속삭였다.

 

병달의 눈에 공정혜의 흰 무릎이 들어왔다.

 

그러다 한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공정혜는 슬픔을 위로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병달은

 

한동안 잠재워야 했던 욕정을 달래 줄 여자가 필요했다.

 

두 사람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공정혜가 눈을 감았다. 순간 병달은 망설였다.


‘이 여자도 끝까지 안 된다는 여자 아닐까?’

 

인화 때문에 적잖이 걱정이 앞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병달은 공정혜의 작고 빨간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한 손은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브래지어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한 손은 치마를 들추고 속옷을 더듬었다.

 

치마 속으로 들어온 손을 제지하던 공정혜의 손이 어느 순간 스르르 힘을 풀었다.

 

낯선 땅에서,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이런 짜릿함을 즐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병달의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공정혜의 손이 더듬더듬 병달의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허, 경험이 있다는 거겠지.’

 

병달은 더 대범해졌다.

 

나중에 일하면서 어색하게 얼굴을 마주보게 될 걱정 따위는 집어치웠다.

 

오히려 한번의 성관계로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달은 사타구니 속옷의 옆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칠한 체모가 만져졌고 이어 미끈한 살이 만져졌다.

 

어? 병달만 대범해진 게 아니었다.

 

공정혜 역시 바지의 지퍼를 내리더니 병달의 아랫도리를 손으로 쥐었다.

 

‘원래부터 얌전한 고양이가 아니었어. 처음부터 달랠 걸.’

 

병달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병달은 거칠게 공정혜의 가슴과 다리 사이를 애무했다.

 

바지를 무릎까지 벗자

 

공정혜가 치마를 들추고 속옷 밑바닥을 한쪽으로 잡아당긴 후 금방이라도 삽입할 태세를 취했다.

 

병달은 이럴 때 자신들이 중국 시장용으로 개발한 풍차바지 속옷이나 정조대 속옷 따위를

 

공정혜가 입고 있었다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막 결합하려는 순간 병달의 전화벨이 울렸다.

 

“난데, 얼른 와. 사장님께서 30분 후에 도착하신다고 연락 왔어.”

 

봉수 선배였다. 병달의 아랫도리는 한 순간에 풀이 죽고 말았다.

 

두 사람은 끓어올랐던 흥분을 삭히느라 연신 물을 들이킨 후 카페에서 나왔다.

 

“오빠가 죽은 뒤 처음엔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살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죠.”

 

상해 민박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반듯하게 앉은 공정혜가 창 밖을 내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는 즐기며 살래요. 그러니까 병달 선배도 즐기며 사세요.”

 

병달은 처음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 일로 병달 선배가 자꾸 치근덕거리면 성희롱했다고 고발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냥 서로 즐길 기분이 들었을 때 그냥 해요. 그것뿐이에요.”

 

병달은 다리를 오므렸다.

 

쉬운 상대로 생각했는데 만난 여자 중에 가장 어려운 상대라는 걸 순간 깨달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자신을 지나치게 방어하는 것 일수도 있었다.

 

인화가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쫄지 말아요.”

 

좀 전까지 차갑게 말하던 공정혜가 병달의 곁에 바짝 다가와 앉으며 팔짱을 꼈다.

 

“사랑한다면 언제든지 선배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정밖에 없잖아요. 그죠?”

 

도무지 속짐작이 가지 않는 여자였다.

 

공정혜는 택시기사 눈치를 보며 병달의 아랫도리를 슬슬 문질렀다.

 

“정말로 한번 드릴려고 작정하고 나온 길이었는데 전화가 와서 다 망쳤지요.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예요.”

 

공정혜가 살짝 병달에게 윙크를 했다.

 


위로일까?

 

인화와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달랐지만 근본적으로 둘 다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까닥 잘못했다간 일자리도 잃고 성추행범으로 구속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 아랫도리가 반응하지 않았다.

 

공정혜도 손을 거두었다.


“병달 선배도 젊은 남자지만 나도 젊은 여자예요.

 

그리고 난 이제 몸이 뭘 요구하는지도 알구요.

 

그러니까 내가 오늘 그랬던 건 내 몸이 요구를 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선배를 괴롭히려고 그런 게 아니구요.”

 

병달의 심정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무서웠다.

 

“원래 그렇게 금방 줄어들어요?”

 

“내가 뭘 어쨌다구요.

 

나는 그냥 사장님이 오셨다니까 걱정이 앞서서 아랫도리가 말을 안 들은 거죠.”

 

“그러면 다행이구요. 아무튼 오늘 기억해 둘게요.

 

그리고 어느 날 선배님이랑 저랑 오늘처럼 뜻이 통하는 날 한번 해요.

 

그때 아주 화끈하게 해드릴게요. 아셨죠?“

 

‘진심이겠지.’ 병달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편했다.

 

택시가 상해민박 집에 도착했다.

 

“사장님께서 오시다니요?”

 

병달은 진국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그 쪽 일 마무리 짓고 오신다고 하시네.”

 

“그런데 그나저나 그 동안은 어디에 가 계셨답니까?”

 

공정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달큼한 냄새가 풍겼지만 전혀 술냄새 같지 않았다.

 

“그거야 모르지. 사장님께 물을 수도 없고.”

 

“채연씨랑 봉수 선배는요?”

 

“잠깐 산책 나갔지.”

 

“둘이 사귑니까?”

 

병달의 말에 진국은 피식 웃었다.

 

“너는 어떻게 된 게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으면 전부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너랑 공정혜 씨도 사귀냐?”

 

병달은 얼굴이 다 빨개지도록 손을 내저었다.

 

“거 봐, 도독놈이 제 발 저린다고.”

 

“선배님 무슨 소리예요. 아니라니까요. 공정혜씨가 말 좀 해 봐요.”

 

“치, 기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때요.”

 

공정혜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서.”

 

진국이 계속해서 병달을 놀려댔다.

 

병달 혼자만 씩씩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진국과 마평수, 그리고 공정혜가 깔깔거렸다.

 

봉수와 채연이 돌아온 뒤 병달과 진국이 푸동 공항으로 차 사장 마중을 나갔다.

 

“너 솔직히 말해봐.”

 

“뭘요?”

 

병달은 진국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진국 혼자 차 사장을 마중 나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병달을 대동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너 공정혜랑 사귀냐?”

 

“아, 아니에요.”

 

병달은 의자가 들썩할 정도로 놀라며 부정했다.

 

“네가 아니라면 다행이고.”

 

진국의 말이 묘하게 들렸다.

 

병달은 씁쓸한 기분을 감추느라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선배님도 공정혜에 대해서 할 말 있으신 거예요?”


“너도 알지? 공정혜가 나를 좋아했다는 거.”

 

“그럼요.”

 

병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 볼 줄은 모르지만, 그래도 여자에 대해선 일가견 있는 것도 알고?”

 

병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야 뭐. 대충 알죠.”

 

“공정혜 만만히 볼 여자 아냐. 근본적으로는 강 이사와 비슷한 여자야.”

 

“강 이사와 비슷하다뇨?”

 

“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선 뭐든 할 여자라는 말이지.”

 

병달이 입을 다물고 창 밖을 내다봤다.

 

병달은 그런 진국의 생각이 고루해 보였다.

 

진국이 여자에 대해 아는 만큼 병달 자신도 여자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공정혜가 처한 가족의 위기를 굳이 진국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퇴직과 사업 실패, 그리고 오빠의 죽음.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인 듯했다.

 

다만 그걸 드러내고 사는 사람들과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점에서 공정혜는 드러내지 않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병달 앞에서 슬픔을 아무 일도 아닌 듯 드러냈다.

 

그건 분명 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점 때문에 공정혜가 강 이사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니었다.

 

진국이 모르는 공정혜만의 인간적인 진면목이 있었다.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할 줄 알았고 불의를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발끈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였다.

 

또한 일할 때 의견 충돌이 생겨 열 내고 싸우다가도 일 밖에서 마주치면 일과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여자였다.

 

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일방적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어떤 판단을 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병달이 보는 관점에서 공정혜는 그야말로 공정한 여자였다.

 

이제는 몸에 있어서도 공정해지려나 싶었는데….

 

병달은 히죽 웃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공정혜는 치마를 걷고 병달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성(城)에 도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왜 웃어?”

 

“아니에요, 그냥 딴 생각 좀 했어요.”

 

“너 엉뚱한 생각하지마, 공정혜는 너 머리 위에 있어.”

 

병달은 토를 달지 않았다.

 

사람이란 게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상대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단점이 있었다.

 

때론 상대의 진심을 깨닫고 변하는 수가 있지만 그건 아주 마음 넓은 사람들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병달은 진국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맞장구를 쳤다.

 

“그럼, 애란 선배 같은 경우겠네요.”

 

“그런데 그건 좀 이상해.

 

내가 보기에 노애란씨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거든.

 

뭔가 우리에겐 말 못할 게 있었거나,

 

아니면 뭔가 우리 회사나 회사 사람이 그녀가 배신하도록 무지 섭섭하게 만든 게 있었을 거야.”

 

병달은 봉수와 한 호텔방에서 나오던 애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봉수와의 관계 때문에 회사를 배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공정혜는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니었다.

 

중요한 순간에 회사를 배신하는 강 이사나 노애란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건 회사를 배신한 것이기 이전에 사람을 배신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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