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키다리 오빠-7
“…….”
유진은 얼굴과 입이 굳은 채로 눈만 껌벅였다. 유미가 말했다.
“원한다면, 나를 가져요.”
유미 또한 굳은 채로 울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유미의 팽팽한 젖가슴이 거친 호흡으로 오르락거렸다.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유진은 대답 대신 포도주 한 잔을 벌컥 다 들이마셨다.
유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에 나를 모델로 써도 좋아요.
오빠한테는 돈 받지 않겠어요.
내 몸을 피사체로 쓰세요.
다만 나를 사랑하지 않은 죄, 죽어서도 후회하게 할 거예요.”
유진은 또 한 잔의 포도주를 따라 벌컥벌컥 마시더니 천천히 말했다.
“아마도 후회하게 될 거 같다. 아니면 죽거나.”
“알겠어요.”
유미는 빠른 속도로 다시 옷을 주워 입고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안녕, 키다리 오빠.”
그날 이유진의 집을 나온 유미는 생애 처음으로 비참함을 느꼈다.
상처받은 마음은 소리쳤다. 좋아, 죽거나 후회하게 만들 거야.
그러나 그건 억지였고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정말 이유진을 좋아한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키만 뻘쭘하게 클 뿐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에게 왜 그토록이나 매력을 느끼는 걸까?
흥, 오죽하면 웃음이 인색해서 한 번 웃기만 해도 온 세상이 환해지게 하는
그 눈웃음 정도가 매력일까.
고자야, 호모야?
옷을 벗지 않아도 주변 10미터 안의 남자들이 침 넘기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는데,
옷을 벗어도 꼼짝 않다니. 내가 옷을 벗으면,
루브르 박물관의 벗고 있는 남자 조각상들의 물건들이 모두 “받들어 총!”을 하진 않더라도,
이건 너무 하잖아.
이유진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다소 유치하게 표현한 것에 대한 후회와 저항으로 유미는
새로운 경험에 자신의 호기심을 한껏 할애했다.
발레리를 통해서 유미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갔다.
발레리는 유미가 프랑스에 오자마자 만난 어학원의 불어 선생이었다.
유미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보이더니 사제지간이 아닌 친구로 사귀자고 했다.
유미보다 두어 살 많은 소설가 지망생 여자였다.
불어가 늘지 않아 고민하던 유미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발레리는 불어 선생 노릇은 취미인 것 같고 자신의 생을 소설을 쓰기 위한 탐색과정으로
여기는 여자였다.
발레리는 부잣집 딸인지 파리 시내에 방 세 개짜리 큰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발레리는 아주 자유분방하며 상상력이 풍부해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가끔 환각파티를 열거나
색다른 이벤트를 꾸미곤 했다.
덕분에 유미는 몇 차례 대마초 맛을 볼 수 있었다.
또 가면무도회나 묻지마 섹스 같은 걸 경험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하는 단체미팅 같은 걸 입을 꼭 다물고 대화 없이 임의로 정해진 파트너와
섹스만 하는 거였다.
대화도 애프터도 금지된 낯선 이와의 단 한 번의 섹스는 짜릿하고 아쌀했다.
“유미, 인생 뭐 별 거 있어? 인생은 모험이야.”
발레리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게다가 유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그녀는 “세 라 비”하고 추임새를 넣곤 했다.
작가 지망생 불어 선생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지만,
유미가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말은 ‘그게 바로 인생이야’라는 뜻인 ‘세라비’였다.
인상파 화가는 있지만 가히 ‘인생파’ 작가라 명명할 만했다.
그러나 유미는 말보다 더 중요한 보디랭귀지를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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