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키다리 오빠-6
“여기 프랑스어 글씨 안 보여요? 대학에서 온 편지잖아요.”
“편지?”
“입학통지서예요.”
“네?”
“가을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라는 어드미션이라고요.”
“제가요?”
“내가 유미씨 대신 입학허가를 위해 몇 군데 대학에 편지를 넣어 봤어요.
유미씨, 여기 왜 왔어요?
지긋지긋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새로 시작하자고 온 거잖습니까?
인생을 업그레이드해요. 돈 안 들고 그럴 수 있는 건 학벌밖에 없어요.
여긴 학비가 공짜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는 계속 유미씨를 돕는다는 약속을 하진 않았어요.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제 방황하면 안 돼요.
불어공부 더 열심히 하고요.
오유미는 이제 그 옛날의 오유미가 아니에요.”
이유진이 하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유미는 눈물이 찔끔 나게 고마웠다.
“그림을 전공했으니까 예술경영 같은 이론 공부를 해 보도록 해요.
정 힘들면 다시 그림을 그리더라도….
서울 강남의 나나는 이제 인생에서 지워 버리도록 해요.
자, 이제 우리 밥 먹으며 축하하러 나갑시다. 옷 갈아입어요.”
유진이 일어나서 나가려 할 때 유미는 저도 모르게 이유진의 등을 안았다.
그리고 그의 등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고마워요. 이 고마움, 지금은 못 갚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예요.”
이유진의 심장 박동 소리가 빠른 리듬의 북소리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날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함께 방으로 돌아와 이유진이 케이크에 초를 꽂으려 할 때
유미는 초를 한 개만 꽂게 했다.
그가 부르는 생일 축하곡을 들으며 유미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 오유미. 멋지게 새로 태어나는 거다.
스물일곱 살의 생일 다음 날인 바로 오늘이 ‘나나’가 아닌 새로운 오유미의 기원 원년이다.
나 멋지게 새로 태어날 거다.
유미는 조용히 어금니를 물었다.
이유진이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며 축하를 했다.
유미는 그동안 섭섭했던 그에게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따스함까지 느꼈다.
“저기요. 이제부터 우리 ‘뛰뚜와예’로 말하면 안 돼요?
유진씨, 아니, 이제부터 난 이유진씨를 오빠라 부르고 싶어요.
정말 이름도 유진, 유미 꼭 남매 같지 않아요?”
“그러지 뭐. 그런데 오빠?
여기 프랑스에선 오누이라도 서로 이름을 부르니까 유진,
유미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아?”
“나보다 세 살이나 나이도 많잖아요?
그러니 오빠처럼 내게 반말 하세요.
그게 좋아요. 억지로 예절 바르게 구는 거, 난 그런 거 별론데.”
“원한다면….”
유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도 유진이 반말로 이야기하자 왠지 친밀감이 더 두터워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유진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감마저 들었다.
그런 감정이 유미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진이 고맙고 사랑하고 싶어졌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자신의 전 재산인 몸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무모하고 갸륵한 생각이 들었다.
술이 적당히 취하자 유미는 일어나서 원피스의 단추를 풀었다.
푸른 원피스는 뱀의 허물처럼 스르륵 벗겨졌다.
유미는 숨도 쉬지 않고 브래지어와 팬티마저 벗었다.
유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난 한번도 스스로 옷을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공짜로는. 그렇지 않으면 옷이란 짐승 같은 남자의 손길에 의해서만
벗겨지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이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나 오빠한테 내가 가진 소중한 걸 다 주고 싶은 마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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