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79)생은 다른 곳에-15

오늘의 쉼터 2015. 4. 7. 17:55

(379)생은 다른 곳에-15

 

 

 

점점 점입가경이긴 하지만, 이유진에 대해 아무 것도 아직 밝혀진 건 없었다.

 

7년 전 그는 파리 교외의 인적 없는 작업실 근방에서 머리를 둔기로 맞고 죽었다.

 

그의 사체를 숲속 후미진 곳에 유기했다.

 

 겨울의 끝에 그 한적한 숲속으로 산책할 사람은 없다.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가 3년 전에 살아서 사진전을 열고,

 

예전 그가 살던 동네와는 다른 근교 도시의 아파트에 살았다는 가정이 말이 되는가?

 

유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유미가 파리로 온 것은, 윤 회장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몇 가지 이유 중에 이유진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살인자가 현장에 와보는 심리 같은 건지도 모른다.

 

우연히 폴을 만나 7년 전 이유진이 살던 방에 임시로 거처하게 된 것도 묘한 인연이라 생각되었다.

유미는 침대에 걸터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곡절과 시간이 흐른 끝에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유미는 자신의 방과 가까운 곳인

 

이 방으로 이유진을 이사하게 했었다.

 

왠지 함께 사는 것은 끝끝내 이유진이 반대했었다.

 

이 작은 원룸 아파트에서 유진은 유미를 가끔 만나 사랑을 나누고 휴식을 취하곤 했다.

 

유진은 파리 근교 작은 마을에 농가를 개조한 아틀리에를 갖고 있었다.

 

사진작업과 병행한 그림 작업은 그곳에서 했고 이 방은 그야말로 그의 둥지와 같은 곳이었다.

침대에 누워 사랑을 나누고 출출해지면 솜씨가 좋은 이유진이 스크럼블드 에그나 치즈를

 

녹인 토스트 같은 걸 간단히 만들어주기도 했던 작은 싱크대도 그대로다.

 

무언가 강렬하게 쏟아내고 난 후의 허기에 그 소박한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질이면

 

눈물까지 날 정도로 먹먹해지던 순간들….

 

열어놓은 창으로 5월의 햇빛 속에서 흰꽃타래를 부라보콘처럼 달고 있던 마로니에 가로수.

 

지금은 헐벗은 가지만 보이지만, 바람결에 커다란 잎이 마치 푸른 손들처럼 환호하듯

 

흔들리던 마로니에 나뭇잎. 

 

유미는 노트북을 켜고 저장해놓은 동영상을 틀었다.

 

‘홍두깨’가 보내준 이유진과의 정사장면을 담은 1분30초짜리 동영상이다.

 

이유진은 그 화면에 생생히 살아 있고, 열어놓은 창밖으로는 푸른 마로니에 잎들도

 

언뜻 보이고 새소리와 섞인 한낮의 TV소리도 들린다.

 

바로 이 방, 7년 전의 이 방…. 이유진과의 추억이 서린 방. 추억이 악몽이 되었지만,

 

어쩌면 그 악몽을 극복하기 위해 유미는 정공법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이유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유진의 죽음을 확인하고, 평생 소멸하지 않고 따라 다닐 그 ‘살인의 추억’도 마침내

 

장례를 치르고 완전 매장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이 방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온다.

 

다니엘의 아파트로 입성을 하게 된다.

 

간혹 유학생들이 외로운 프랑스의 독거노인들과 말벗이 되었다가

 

노인이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와는 다르겠지만, 무언가 출발이 좋다.

이유진의 문제는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인가.

 

그까짓 망상, 이제 무시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날갯짓을 해야 하는가.

 

유미는 가방 깊숙이 보관했던 파리 시절의 일기장과 수첩을 꺼냈다.

 

유미가 간직한 생의 기록들은 사촌 수민의 집에 대부분 맡겼지만,

 

프랑스로 오면서 그것들을 챙겨왔다.

 

수첩을 꺼내보니 당시 지인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새로운 일을 위해 더러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일기. 몇 번이고 태울까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읽고 싶지 않았으나 버릴 수 없었던….

 

유미는 그것을 펼치고 7년 전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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