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키다리 오빠-1
이유진은 좀 특별한 남자였다.
날카롭지만 웃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눈매를 가진 사람답게 섬세한 감정을 가졌으나
무섭도록 절제할 줄도 아는 남자였다.
다시 말해 기회만 있으면 껄떡대는 ‘껄떡남’ 스타일이 아니라 뭔가 냉정한 구석이 많았다.
그게 요즘 말하는 ‘까도남’이나 ‘차도남’ 스타일 하고는 다른 게,
성격이 차갑다고나 까칠하다고 말하기에는 뭐한 그런 구석이 있었다.
무섭도록 절제할 줄 아는 남자라고 했지만, 딱히 그게 절제심에서 나온 건지 뭔지도
아리송할 때가 많았다.
어찌 보면 절제심이 아니라 무심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유미가 경험해 본 남자는 돈이 많은 놈들은 돈 들인 값만큼 어떡하든
단맛을 다 빼먹으려 하는 놈들이고, 돈이 없는 놈들은 가진 게 없으니
유미에게 매달려 죽자 살자 집착하고 못살게 구는 놈들이었다.
걸핏하면 손목을 긋고 눈물겨운 협박으로 유미에게 집착하던 손진호에게서
벗어나 혼자 이국에서 살게 되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이렇게 낚싯밥이 안 먹히는 이상한 남자를 보니
그것도 기분이 나빴다. 무시하면 될 텐데, 그게 좀 어려운 것이,
프랑스어도 못하고 물정도 어두운 유미가 이유진을 무시하고 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이유진은 유미에게는 꽤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는 말이 없고 무뚝뚝한 편이다.
유미는 쓸데없이 말이 많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 대신 풍부한 감정을 가슴에 담아 두고 눈빛으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이유진은 꼭 필요한 정보나 말만 하고 뭐든지 유미가 자립적으로
이국 생활에 정착하도록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게 이상하게 섭섭했다.
그래서 유미는 정착 초기에 이유진에게 기대었던 마음에 뜻하지 않은 배신감으로
더욱더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이유진의 충고도 무시하고 한동안은 방황과 방탕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이유진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유미를 바라보곤 했다.
유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 눈빛. 그 눈빛은 유미의 온 마음과 온몸을 저리게 하고
온 생애를 흔들었다.
당시엔 그게 뭐였는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철저하게 버림받고 이 세상에 홀로라는,
외롭고 위태로운 자의식을 가진 유미에게는 왠지 ‘혈육’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빠의 존재를 모르는 유미는 어릴 때부터 상상 속의 아빠를 꿈꾸곤 했다.
그 아빠는 유미가 힘들 때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도움을 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소설에 보면 ‘키다리 아저씨’는 훗날의 연인이 되지만, 사춘기 때 그 소설을 읽은 유미는
그 ‘키다리 아저씨’ 같은 아빠를 꿈꾸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독지가의 대리인으로 이유진이라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
유미는 무언가 올 것이 왔구나,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유진은 죽을 때까지 독지가의 신분을 철저하게 함구했는데 만약 이유진이 죽지 않았다면
그 부분을 반드시 알아내고 싶었다.
유미는 원래 왠지 ‘아빠’ 같고 왠지 ‘오빠’ 같은 혈육의 느낌을 주는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다.
‘키다리 아저씨’와 연결된 이유진이 당시 유미에게는 신비로운 ‘키다리 오빠’처럼 여겨졌다.
아무도 없는 이국에서 아빠나 오빠처럼 그를 의지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게 연애 감정과 뒤섞여 자신도 알지 못할 이상한 심리 상태가 되었다.
그건 유미도 이해하지 못할 심리 상태였다.
유미 안에 있는 어리광 같기도 하고 유치한 퇴행 심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유진은 유미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거나 문제가 생길 경우 말고는
먼저 연락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어느 여름밤, 너무도 외롭던 유미는 술에 잔뜩 취해 이유진에게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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