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78)생은 다른 곳에-14

오늘의 쉼터 2015. 4. 7. 17:53

(378)생은 다른 곳에-14

 

 

 

하긴 프랑스 여자는 식사하면서 토론을 벌일 정도로 수다스럽고 말이 많다.

 

하지만 나는 여러 사람들 속에서 불어를 구사하고 듣고 하는 게 피곤하다 보면

 

그저 부처 같은 온화한 미소라도 짓고 있어야지 별수 있나.

“동양 여자는 신비롭거든요. 드세지 않고 고요하고 순종적이고….”

다니엘은 동양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굳이 환상을 깰 것까지야 뭐가 있겠나. 유미는 마치 카메라 앞에서 커피 광고의 연기를 재연하듯

 

커피잔을 들어 코로 향기를 마시며 살짝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아, 바로 이 미소!”

다니엘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러고 보니 유미 당신 덕분에 오늘 아침 커피향이 다른 날보다 훨씬 매혹적으로 느껴지네요.”

다니엘도 커피를 맛나게 마셨다.

“메르시!”

유미도 고마움을 표시하며 활짝 웃었다.

“집이 마음에 드세요?”

“예,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집이에요.”

“하루라도 빨리 옮겨 오세요.

 

당신과 함께 맛있는 커피를 함께 마시며 새날을 열고 싶어요.

 

소피를 사랑하지만 그녀와는 단 하루도 아침을 함께 열 수 없으니….”

갑자기 다니엘의 얼굴에 검은 독수리 한 마리가 지나가듯

 

문득 고독의 어두운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좋아요. 멋진 커피 메이트가 되어드릴게요.”

유미가 경쾌하게 말했다.

유미는 다니엘에게 가능하면 빨리 정리하고 이사를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좁은 원룸 아파트에 들어와 핸드백을 던지고 침대에 큰 대자(大字)로 벌렁 누웠다.

 

무언가 새로운 생이 유미의 인생 2막에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루하루 쪽대본으로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올라야 할, 막을 올리기 전까지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녹화도 안 되고 편집도 안 되는 인생극. 

 

그러다 갑자기 유미는 일어나 앉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나서 좀 있다 한 남자가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관리인 사무실 맞죠?”

“예, 그런데요.”

남자는 본토 프랑스인 억양이 아닌 듯했다.

“무슈 카파?”

“예, 접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 아파트 703호에 사는 입주자 중에 무슈 리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요.”

“무슈 리?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입주자 정보를 전화상으로 함부로 얘기해 줄 수 없어요.”

“그러시겠죠.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 남자가 한국인인가요?”

“남자? 한국인? 그건 잘 모르겠고.

 

그 집은 몇 달 전부터 바캉스를 다녀오겠다며 비워둔 지 꽤 되었어요.

 

아마 곧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집 사람들 성은 리가 아닙니다.”

“네? 제가 분명 우편함에 쓰여 있는 성을 보았는데요.”

“아마 그건 예전 입주자의 성인가 보죠. 잘못 봤을 거요.”

예전 입주자? 그럴 수 있겠다. 3년 전의 주소니까 이사를 갔을 수도 있겠다.

 

새 입주자가 귀찮아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표를 안 붙일 수도 있을 테니.

“그럼 지금 입주자는 성이 뭔데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화로 입주자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까발리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아, 이만 바빠서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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