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69)생은 다른 곳에-5

오늘의 쉼터 2015. 4. 7. 17:26

(369)생은 다른 곳에-5

 

 

 

라파예트 백화점은 유미가 살던 8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는 고급스러운 백화점의 전형이었는데, 지금은 중국인 단체관광객들로 붐볐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쇼윈도 장식도 2월인 지금은 없어지고 매장도 중저가 브랜드가

 

많이 입점되었는지 번잡스럽고 정리가 안 된 인상이었다.

 

잦은 세일을 하는 한국과 달리 일 년에 두 번만 세일하는데 지금은 꼭 세일기간처럼 붐볐다.

 

유미는 슬쩍슬쩍 아이쇼핑을 하며 매장을 지나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최고급 패션의 거리 몽테뉴가나 샹젤리제가로 갈걸 그랬나?

샤넬 매장에 가서 기본적인 아이템인 블랙미니 드레스를 한 벌 구입하려고 보니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마침 가격도 적당하고 아주 심플한 디자인의 검정색 미니 원피스가 보였다.

 

입어 보니 오히려 유미의 보디라인을 살려 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유미는 망설이다가 그냥 지르기로 했다.

 

한번 지름신이 동하니까 겁날 게 없었다.

 

겐조 매장에 가서는 눈길을 사로잡는 봄기운이 물씬 나는 블링블링한 드레스도 질러 버렸다.

 

은색의 구두굽이 송곳처럼 위태위태한 지미추 킬힐까지 질러 버리자 그제야 성이 찼다.

 

갑자기 동하는 맹렬한 식욕처럼 솟구친 탐욕이 성에 차자 마치 섹스의 뒤끝 같은

 

이상한 만족감과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왔다.

유미는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에서 나와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오페라극장 근처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샐러드와 도미구이,

 

그리고 화이트와인 한 잔을 시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쓸쓸한 2월의 저녁이었다. 2월은 존재감이 희미한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겨울과 봄의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어정쩡한 이 계절이 유미는 답답했다.

 

방이 빨리 구해지지 않으면 여행이라도 갈까?

 

어차피 짐도 없는 몸. 아, 2월엔 베네치아 축제가 열릴 텐데….

 

유미는 갑자기 인규 생각이 났다.

 

인규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아른거렸다.

 

외우고 있는 인규의 전화번호가 뇌리를 맴돌았다.

 

이미 몇 번 전화를 해 봤는데, 임자가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왔었다.

 

유미는 아무 생각 없이 번호를 눌렀다.

 

역시 마찬가지 멘트가 흘러나왔다.

 

인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중에 지완에게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그런데 화이트와인이 한 잔 들어가자 유미는 지완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갑자기 시차 생각이 나서 전화를 끊으려는데, 금방 지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안. 지완아, 너 자지? 나 유미야.”

“어머! 유미야!”

놀란 지완의 목소리에는 잠기가 없었다.

“괜찮아. 안 자고 있었어.”

“왜 여태 안 자고 있었어?”

“나 누구 전화 기다리고 있었거든.”

지완의 목소리가 의외로 밝았다.

“지금 이 시간에? 혹시 내 전화?”

“그렇다고 말하면 믿겠니?”

“그럼 해외에 간 애인?”

유미가 그냥 슬쩍 찔러 본 건데 지완이 팔딱 뛰었다. 

 

“어머! 어머! 오유미, 너 정말 무당기 있다, 얘.”

아아, 지완에게 새 애인이 생겼구나. 박용준은 그래서 차였구나.

“유미, 넌 어디야?”

“나도 해외야.”

“해외?”

“프랑스야. 내가 해외에 나간 거 몰랐니? 같이 여행이나 하자고 한 게 누군데?”

“그러게 말야. 사람 팔자 시간문제야. 한두 달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

“많은 일?”

“응. 그것도 한꺼번에.”

“너 혹시 인규씨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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