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생은 다른 곳에-4
“이름은 이사벨이고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에요. 말이 없고 잘 안 웃어요.”
“프랑스 여자니?”
사내아이는 유미를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마담은 프랑스 사람 아니에요?”
“이사벨이 나 같은 동양 여자냐구?”
“잘 모르겠어요….”
아이는 고개를 또 갸웃했다.
프랑스에서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프랑스인일 수 있다.
인종 전시장인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프랑스인이라고 아이들은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금발에 푸른 눈보다는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한 프랑스인 여자가 더 많을 것이다.
유미는 아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아이도 자전거를 타고 유미에게 인사를 한 후 공원 쪽으로 달려 나갔다.
유미는 카페에서 찬 맥주를 시켜 찬물처럼 벌컥벌컥 마셨다.
약간 진정이 되자 아파트로 다시 돌아가 관리인 사무실로 곧바로 갔다.
그러나 관리인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근무시간표를 확인하니 이미 퇴근한 시간이었다.
잠깐 맥주를 마시는 사이에 퇴근했나 보다.
한국과는 달리 아파트 관리인은 정해져 있는 근무시간만 지키며,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더더군다나 입주민의 신상명세서 같은 기록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고급 수위일 뿐이다.
유미는 일단 관리인 사무실의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기분이 찜찜했지만, 다음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유미는 돌아섰다.
무언가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그것만이 오늘 얻은 확실한 결론이었다.
다니엘의 전화를 받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였다.
그는 내일 저녁에 식사를 함께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였다.
유미야 만사 제치고 오케이를 할 참이었다.
유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파리 시내의 레스토랑에 예약을 하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용건만 간단히 통화한 후에 유미는 다니엘이라는 남자에 대해 지하철 안에서 상상을 해보았다.
돈은 많지만 수수하고 평범한 차림을 즐기는, 공과 사가 분명한 성격의 남자일 것이다.
분명히 속물근성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지만, 세 번의 이혼 경력이란 무언가
성격적으로든 성적으로든 결함이 약간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니면 결혼 운이 지독히 없던가.
50대의 남자란, 유미의 오래된 룸살롱 경험에 의할 거 같으면,
돈과 시간이 적당히 풍족하고 인생에 대해 어느 정도 알 만한 나이라
이제부턴 인생을 즐길 줄도, 반대로 인생이 시들하게도 느껴지는 나이다.
뜨거운 열정의 도가니에선 물러선 나이이긴 하지만,
한마디로 아궁이 밖으로 기어 나온 지푸라기 같은 나이다.
불이 붙으면 금방 아궁이로 옮아가 탈 수 있는 나이다.
폭탄 그 자체는 아니지만 도화선처럼 위험한 때이기도 하다.
그만큼 충족한 듯하면서도 허전하고 외로운 나이다.
물론 상대했던 한국 남자들의 이야기다.
유미는 귀가하려던 마음을 바꿔 라파예트 백화점이 있는 역까지 가서 내렸다.
백화점에 가서 옷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급히 한국을 떠나오다 보니
사촌 수민의 집에 세간이며 옷들을 맡기고 짐을 많이 가져오지 못했다.
간편한 캐주얼 복장 말고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오랜만에 디너 초대를 받지 않았는가!
예쁜 옷을 한 벌 사고 싶었다.
이브리에 다녀온 무거운 마음을 쇼핑으로 해소하고 싶었다.
그동안 고치 속에 애벌레처럼 움츠렸던 유미의 가슴으로 잊었던 본능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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