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세상의 기원-15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이라 한쪽 뺨은 가리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막 웃더라고요.
그때 어떤 탤런트를 닮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거 왜 살인미소로 유명한….”
유미는 휴대폰을 한쪽 뺨에 붙이고 있는 고수익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미술관에 왔던 그 남자가 돌아서면서 무슨 농담을 한마디 하고 나가는데,
웃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아! 저 웃음… 갑자기 해골이 간질간질하더라고요.
그가 바로 그 남자와 연결된 게 그 다음 날 아침이었어요.”
유미는 머릿속에 찌르르 울리는 경보음 같은 걸 들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무슨 농담이었는데?“
“뭐였더라? 아, 맞다. 내가 미소가 참 멋집니다.
살인미소로 여자 여럿 죽였겠어요, 라고 좀 객쩍은 농담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 다시 한번 더 씨익 웃으며 돌아서더니,
붕어빵에 붕어 없고 국화빵에 국화 없죠.
뭐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더라고요.”
“비슷한 사람 많아. 사람 잘못 봤을 거야.”
유미가 단칼에 용준의 말을 자르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그런데 지난번에 쌤이 어떤 젊은 친구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신 게 바로 그 남자구나,
생각이 또 팍 들더라고요.
그때 그 차종이 같아요.
제가 차적 조회 알아본 결과에 의하면….”
유미는 가슴에 돌이 하나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남자는 누구예요? 쌤도 그 남자에게 추적당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
나한테 알아보란 거 아니에요?”
아니, 난 정말 몰랐어.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바보 같겠는가.
이젠 박용준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에게 되묻지 마라 그랬지?
그리고 이제 전화 끊자.
한동안 재충전하며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어서 잠수탔는데, 가끔 통화하자.
좀 있다 활동 재개할 거야.”
“알겠어요. 그러셔야죠. 저도 가끔 소식 전할게요.”
용준과 통화하고 나서 유미는 고수익이 인사동 화랑에서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고의로 접근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용준의 기억에 의하면,
예전부터 유미를 미행했고 추적해온 의문의 남자라니.
세상, 참 무섭다. 누가 그를 조종하는 걸까?
유미는 저녁 대신 부르고뉴 와인을 한 병 땄다.
이곳이 좋은 이유는 슈퍼에서 적당한 가격에 고른 와인도 꽤 맛이 있다는 거다.
역시 슈퍼에서 이것저것 골라온 모둠치즈를 꺼내 저녁식사 대신 차렸다.
술이 적당히 취하자 유미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서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서 은둔하며 썩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줄을 쥐고 흔드는 이가 누구인지 끝까지 추적해서
마지막 얼굴을 대면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가 자신을 줄에 매달고 또 다른 인형들을 조종해서 자신에게 접근시키고….
그럼, 내가 이곳의 ‘기뇰’이라 불리는 줄 달린 인형 노릇을 했단 말인가.
그 누군가는 무엇을 위해 그런 꼭두각시 놀음을 한 걸까?
심심해서? 아님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걸까?
이 줄을 차근차근 추적해서 따라 올라가 보면 누구를 만날 것인가.
이 문제 또한 존재나 인생의 기원을 찾아가는 일이겠다.
유미는 해답을 찾기도 전에 취해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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