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61)세상의 기원-12

오늘의 쉼터 2015. 4. 7. 17:09

(361)세상의 기원-12

 

 

 

“팸플릿 하단에 주소가 있는데, 그곳이 그의 화실 또는 자택의 주소가 아닌가 싶네요.”

“그럼 그 주소를 제가 좀 적어 가도 되겠습니까?”

유미가 수첩을 꺼내며 물었다.

“오, 물론이죠.”

주소는 파리의 근교였다. 유미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주소를 옮겨 적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미가 사의를 표하자 디렉터는 몸에 밴 친절과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말했다.

“별 말씀을요. 부디 사랑의 기적을 이루세요.

 

예수처럼 부활한 당신은 분명 사랑의 기적도 만들어낼 겁니다.”

웬 예수? 웬 부활? 웬 기적? 유미가 불치의 병에서 회복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그런 비유를 쓴 것이리라.

 

하지만 유미는 이유진의 주소를 적으면서 속으로 소름이 돋는 걸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람! Eug??e Lee. 원래 유진이란 이름은 서양식 이름이다.

 

극작가 유진 오닐, 한국계 바이얼린 연주가 유진 박도 있지 않은가.

 

이유진의 부모가 아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할 걸 알고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유진은 자신의 이름을 ‘Yoojin’ 대신 ‘Eug??e’라고 표기했던 것 같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 이름을 ‘Eug??e’라 표기하고, ‘외젠’이라 발음했다.

 

외젠 들라크루아. 화가 들라크루아의 이름도 외젠이다.

사진작가 Eug??e Lee. 유미는 나중에 그 주소로 찾아가 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 주소에 정말 이유진이 살고 있다면? 그럴 리 없어!

 

유미는 기억하기도 싫은 그때 그 순간의 장면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손에 피를 묻힌 황인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쥐어짜듯 겨우 말했었다.

 

아니 선고했다. 끝났어. 끝.났.어. 그걸 끝으로 유미의 기억은 단속적으로 끊어졌다.

 

이상하게 인간의 기억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집된다.

 

인간은 기억하기 끔찍한 부분들은 무의식적으로 지우려 노력한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그 기억이 이제는 희미하다.

 

사실이 아니라 그저 잠깐 악몽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목격자도 없고 증인이 없으니, 유미 스스로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다만 인규가 살아있으니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거할 뿐이었다.

 

그러나 인규조차 이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오히려 덮어버릴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아이디 ‘홍두깨’란 인간은 누구인가.

 

이유진인가? 목격자인가? 유령인가?

유미는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이메일을 체크하니 박용준의 메일이 와 있었다.

‘그리운 샘.

샘이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샘은 참 독한 여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떠날 때 말도 한 마디 없이 떠나셨는지….

 

온 세계가 다 하나로 연결되었는데 제가 샘에게 닿을 수 있는 게

 

이 이메일 주소 하나밖에 없다니…. 그런데 메일 받고도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너무합니다.

 

적어도 최후의 보디가드 박용준에게만은 핫라인이 연결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샘의 신변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어디 계시는 겁니까?

 

외국으로 나가셨나요?

 

이 용준이가 껄떡대는 코 큰 놈들 사이에서 샘을 지켜야 하는데….

 

코 크다고 다 큰 게 아닌 거 아시죠?^^ ㅋㅋ

 

샘, 그립습니다.

 

어디 계시든 제게 전화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빅뉴스가 있는데. 전화든 메일이든 꼭 연락 한번 주세요. 바이~~.’ 

 

용준에게서 벌써 두 번째 온 메일이었다.

 

유미는 망설이다가 용준에게 전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적어도 통로가 하나는 있어야겠지.

 

유미는 용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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