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세상의 기원-11
주민등록 말소는 실종이나 사망신고로 인해 이루어지는 신고말소와 오래 국내에
거주지를 두지 않은 경우 행정기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권말소가 있는데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고 한다.
두 가지 다? 죽거나 해외에 살고 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도움이 되지 않는 답이었다.
어쨌거나 지난해에 윤조미술관 일을 볼 때 이유진의 일로 폴에게 전화했을 때,
그가 지나는 말로 했던 게 유미에게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이유진이 몇 년 전에 파리에서 사진 전시를 했다는 소리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는 폴의 그 말….
유미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바스티유 근처의 갤러리로 향했다.
파리 메트로를 타고 생 폴(St. Paul)역에서 내려 작은 갤러리가 있는 구역을 걸어갔다.
마침내 폴이 말한 갤러리 앞에 서자 유미는 잠시 가슴을 눌러 진정을 했다.
갤러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갤러리 내부로 들어가자 아프리카 오지의 여인들을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리셉션 테이블에 앉은 여직원에게 용건을 이야기하자
그녀가 인터폰으로 어딘가 연락했다.
“저쪽 방으로 들어가 보세요.”
여직원이 갤러리 책임자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갤러리의 디렉터라는 남자는 유미에게 친절했다.
유미는 3년 전 이곳에서 전시한 사진작가 이유진의 근황과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재작년부터 이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 사람을 기억하진 못합니다.
아마 전임자인 마리안느가 알 거 같은데….”
“그 사진작가의 연락처만이라도 알 수 있으면….”
“무슨 일로 그러시죠?”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필요하시다면 말씀드리지요.”
이곳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 즉 사생활을 무척 존중한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적인 사생활이라면 더욱더….
“10년 전에 파리에서 함께 살던 연인이에요.
제가 몸이 아파 한국으로 떠나면서 피치 못하게 헤어졌어요.
당시엔 불치병이었죠.
그를 사랑했기에 죽을 몸인 저는 몰래 떠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건강해졌어요.
아직까지 그를 잊지 못해서 결국 큰 결심을 하고 이곳에 왔어요.
그를 만나면 이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인생의 친구로는 살 수 있겠지요.”
“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군요.”
남자의 푸른 눈이 빛났다.
“서류를 꺼내 찾아보죠. 이름이 뭐라 그랬죠?”
“이유진. 유진 리….”
“유진 리, 유진 리, 유진 리….”
남자가 서류장을 열면서 노래의 후렴구를 반복하듯 말했다.
이유진이 정말 이 갤러리에서 사진 전시를 했단 말인가?
그는 7년 전에 죽었을 텐데….
“아! 찾았다!”
“!”
유미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외젠(Eugene) 리, 여기 있네요.”
남자가 팸플릿을 꺼내 왔다.
작은 팸플릿에는 그의 사진 몇 컷이 실려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나와 있지 않았다.
사진은 작은 정물들을 오브제로 확대하여 찍은 것들이었다.
레몬의 단면이라든가 포크의 결, 나무 식탁의 모서리, 바게트의 속살, 말린 꽃들 같은 거였다.
유미가 알던 이유진의 작품 세계와는 달랐지만 7년이란 세월은 얼마든지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가 죽지만 않았다면.
“연락처는 안 나와 있네요. 다만….”
유미는 남자의 입을 바라보았다.
'소설방 > 유혹' 카테고리의 다른 글
(362)세상의 기원-13 (0) | 2015.04.07 |
---|---|
(361)세상의 기원-12 (0) | 2015.04.07 |
(359)세상의 기원-10 (0) | 2015.04.07 |
(358)세상의 기원-9 (0) | 2015.04.07 |
(357)세상의 기원-8 (0) | 201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