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57)세상의 기원-8

오늘의 쉼터 2015. 4. 7. 17:02

(357)세상의 기원-8

 

 

 

“한국말이, 한국 음식이 그리워요.”

유미가 대답했다.

“음, 한국 요리라면 어떤 거? 한국 식당에 갈래요?”

“아니, 너무 기운이 없어요. 나 지금 졸려 미치겠어요. 속이 확 풀리는 국물이 먹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유미는 잠으로 혼절하듯 미끄러졌다.

 

누군가의 손길이 이마를 짚어 보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 준다는 안온한 느낌에 마음이 놓였다.

얼마나 잤을까? 구수한 냄새와 훈훈한 공기가 의식이 돌아온 유미에게 달려들었다.

 

원룸의 좁은 부엌에서 유진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국자에 입을 대고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 일어났어요?”

유진이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 빤히 보고 있는 유미를 보며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요 앞 광장에 아침 시장이 열리는 날인가 봐요. 장을 좀 봤어요.

 

그런데 그동안 끼니를 어떡하고 살았던 겁니까?

 

무슨 여자가 살림을 사는 건지 뭔지….

 

맨 포도주병 빈 거 하고 먹다 남은 말라빠진 바게트 조각들하고

 

냉장고엔 곰팡이 핀 치즈밖에 없어요.”

유미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화제를 바꿨다.

“몇 시예요? 어머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네요.”

“그래요. 하루 종일 죽은 듯이 자더군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유미씨 자는 동안 소꼬리를 좀 사다가 꼬리곰탕을 푹 끓여 봤어요.”

“꼬리곰탕요?”

“네. 다 됐어요. 여긴 소꼬리가 무지 싸요.

 

한국서는 소꼬리 정말 비싸잖아요.

 

유미씨, 몸보신 좀 해야겠어요.

 

원래 보신탕이 최고인데 그럴 수는 없고 개 대신 소꼬리입니다.

 

그리고 된장찌개 끓이고 있는데 간 좀 볼래요?” 

 

정효수와도 손진호와도 살아 봤지만 그들은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능숙하게 음식을 하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전생에 그와 부부로 살았던 것 같은 데자뷔 느낌은 무엇일까?

 

아직 마약 기운이 남아 있는 걸까?

 

달콤하고 슬프고 몽롱했다.

 

인색한 늦가을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유진의 뒷모습을 비췄다.

 

유미는 유진의 성의가 고마워 일어나서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휘청, 어지러웠다.

 

유진이 국자를 팽개치고 유미를 안았다.

“괜찮아요?”

그의 몸에서는 마늘과 파냄새가 살짝 풍겼다.

 

도마에 방금 찧은 마늘과 썰어 놓은 파가 눈에 들어왔다.

 

된장찌개는 순하면서도 맛이 좋았다.

“한국슈퍼에서 파는 된장이라 깊은 맛은 없어요.

 

밥도 지었으니 꼬리곰탕에 말아서 식사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김치를 좀 가져오는 건데.

 

지난번에 담근 게 맛이 들어 괜찮던데.”

“김치도 담가 드세요?”

“그럼요. 한 삼년 그렇게 혼자 살다 보니까 음식 만드는 거 별거 아니더라고요.

 

식탁에 자리 잡으세요.”

식탁으로 쓰는 작은 원탁에는 꽃이 꽂혀 있었다.

 

유미가 쳐다보자 유진이 웃었다.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는데 그 옆에서 아가씨가 꽃을 팔더라고요.

 

기분 전환에는 꽃이 최고입니다.”

유미는 이유진의 다정다감함과 섬세함에 깊이 마음이 술렁였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사무적이었다니.

 

유진이 마련해 준 따스한 음식은 유미의 몸과 마음을 금세 녹여 주었다.

“오늘 유미씨 보니까 제게 좀 섭섭하셨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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