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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세상의 기원-6

오늘의 쉼터 2015. 4. 6. 23:58

(355) 세상의 기원-6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유미는 불안과 자유라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진흙탕 속 같은 한국을 빠져나옴으로써 자유로웠지만,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 불안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이유진은 약속대로 유미가 정착하는 데 도움을 주긴 했다.

 

파리 시내에 작은 방을 얻어주었고, 소르본 대학에서 여는 어학교실 등록을 도와주었다.

 

그 일처리가 어찌나 사무적인지 유미는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꼈다.

 

파리 하늘 아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건만,

 

저녁시간에 함께 와인을 곁들인 식사라도 하자고 하면 아주 예절 바르게 사양했다.

“오유미씨, 여기서는 무조건 최대한 돈을 아껴야 합니다.

 

여기서 돈 버실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분이 정착금을 주셨다고는 하지만 일회성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돈을 보낸다는 약속 같은 건 아직은 전혀 없으니까요.”

“알아요. 여기 물가가 장난이 아니네요.

 

삼천만원이면 얼마 오래 버티지 못하리란 것도 알겠어요.

 

하지만 이 선생님이 애쓰시는데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이유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제 일이니까요.”

“그럼, 그분한테서 따로 보수를 받나요?”

“그런 건 오유미씨가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

“아, 네에….”

“그리고 이제 이 정도면 생활하시는 데 당장 큰 불편함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소임을 다한 거 같습니다.

 

언어 때문에 한동안 불편하시겠지만,

 

제가 곁에서 도와주면 오히려 더 늘지 않아요.

 

꼭 필요한 때에만 제게 연락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럼 우리 자주 못 보나요? 연락하지 말라고요?”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저도 제 개인 생활이 있고, 오유미씨도 새로운 생활에 열심히 적응하셔야죠.” 

 

“그냥 친구로 가끔 만나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는 맺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유진이 그렇게 말할 때,

 

유미는 별종이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생각했다.

 

남자들은 유미를 보면 돈을 물 쓰듯 쓰면서라도 털끝 하나라도 닿고 싶어 하지 않았나?

 

그동안 화류계에서 육욕의 화신 같은 남자들만 보다가

 

이렇게 공과 사를 딱딱 구분 짓는 남자를 보니 오히려 섭섭했다.

 

무인도에 홀로 똑 떨어진 느낌으로 너무도 외롭고 불안한데,

 

이 남자 밤에 포도주라도 기울이며 외로운 처지끼리 좀 체온을 나누어도 좋으련만.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무료로,

 

아니 식사 대접이라도 하며 말벗이라도 돼주겠다는데 왜 이리 쌀쌀맞은 걸까.

 

이유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어, 언어가 빨리 늘려면 프랑스 남자를 사귀세요.

 

한국 사람들은 멀리 하는 게 좋아요.

 

여러모로 도움도 안 되고….”

조언이랍시고 이런 걸 말하는 남자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건 제 일이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유미도 아까 이유진의 말을 패러디하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이유진이 금방 후회하는 눈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오해는 마세요. 사귀라는 게, 그냥 친구로 사귀라는 거지요.”

“그 충고 새겨들을게요. 하여튼 고마워요. 그런데, 이 선생님! 두고 보세요.”

자존심이 상한 유미가 오기를 부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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