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 세상의 기원-3
그러고 보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도처에 깔려 있다.
동네 주변은 여전했다.
유진과 자주 가던 모퉁이의 카페도 그대로 있었고 카페 주인도 좀 더 늙었을 뿐 건재했다.
파리는 10년이 돼도 서울처럼 쉽게 변하는 곳이 아니다.
창을 열어 유미는 밖을 내다본다.
겨울의 습기가 밀려 들어온다.
파리의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10년이란 세월 너머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밀려왔다.
유미는 이유진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떠올렸다.
4월의 어느 맑은 날이었다.
세상은 화사한 봄이었지만, 유미는 화중지옥(花中地獄)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게 참담한 봄을 보내고 있었다.
논현동의 룸살롱에서 새끼마담을 하고 있었는데,
호스티스 여자애들이 속을 썩이거나 사고가 나거나 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진호와 몰래 동거를 하고 있던 때였다.
유미가 ‘수빈’에서 일할 때 아르바이트로 웨이터를 하던 진호를 만났다.
그후 진호는 웨이터를 그만두고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지만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백수였다.
무능한 진호는 미안해하면서도 유미를 절대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미의 전 남편 정효수가 이혼을 해 주려 하지 않던 초기의 기간을
겨우 벗어나 유미가 이혼을 했으니 자신이 마치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의 집착이 심해질수록 유미는 점점 더 숨이 막혀 왔다.
겨우 정효수로부터 벗어났는데 손진호라는 남자에게
다시 노예계약이 승계된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진호는 빈대인 주제에 유미 입에서 술 냄새만 나면
그 짓 당장 때려치우라며 싸움을 걸었다.
그럼 당장 나를 먹여 살리라고 유미가 울며서 대들면
그는 유미를 껴안고 함께 울었다.
말이 새끼마담이지 유미 손으로 들어오는 돈이 쥐꼬리만 해서
유미는 몰래 포르노를 찍었다.
유미는 진호의 아기를 가졌지만,
이를 악물고 헤어질 생각으로 아이마저 지우고 포르노를 찍었다.
그걸 알고 진호는 유미에게 손찌검을 했고 유미는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다음 날 유미는 진호를 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인생이 진흙탕 속에 빠져 헛도는 타이어 같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이었던 엄마 또한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게 겨우 몇 달 전이었다.
유미는 엄마를 꿈에서라도 만나면,
어떻게 죽으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죽음인지 엄마한테 묻고 싶었다.
밤마다 눈을 감으면 이대로 흙 속에 묻혀 내일 아침에는 빛을 보지 말기를 바랐다.
그때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단골인가 싶었지만, 모르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오유미씨죠?”
“예…. 그런데요.”
본명을 묻는 걸 보니 업계쪽의 인연은 아니었다.
“저는 파리에서 온 이유진이라는 사람입니다.”
“파리요?”
유미는 도무지 감이 안 잡혀서 요즘
새로 문을 연 파리라는 이름의 룸살롱이 있던가 잠깐 생각했다.
아니면 파리다방?
그런 이름은 옛날 구식 다방이라 요즘은 사라진 지 오래인데….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의 심부름으로 오유미씨를 만나야 하거든요.”
“저를요? 왜요? 누가요?”
“하하…. 그렇게 한꺼번에 물으시면 대답하기 힘듭니다.
우선 세 가지 질문 중에 첫 번째 질문만 대답하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질문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더더욱 만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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