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파멸 혹은 연민-13
“병 속의 새가 아니라 원래는 거위였지.”
“새나 거위나.”
옛날에 한 농부가 주둥이가 좁고 긴 병에 작은 새를 넣어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덧 새가 자랄수록 병의 입구가 더욱 작아져 새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냥 놔두면 새는 죽게 된다.
병을 깨트리지 않고 또 새를 다치게 하지 않고 어떻게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유미는 자신의 상황이 꼭 그 새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꼭 병 속에 들어간 새 같아. 갑갑해 죽겠어.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자유로운 새가 되었으면 나야말로 진작에 하산했지.”
정효가 허허 웃었다.
“그럼 나 좀 빼내 줘, 정효 스님.”
“그 병에 네 스스로 들어갔으면 스스로 나와야지.”
“다이어트를 할까?”
“그것도 좋고.”
“아냐. 누군가가 꺼내주지 않으면 안 돼.
병 주둥이를 없애는 거야.
페트병이면 가위로 잘라버리면 될 텐데.
유리병이라면 결국엔 유리병을 깨뜨리는 수밖에는 없을 거야.”
“병에 왜 그렇게 집착하니.
네 눈에는 아직도 병이 보이니?
병 밖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그 병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고
병 안에 있으면 그렇게 나오고 싶어 하고.
그 안팎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아야 자유로운 새가 되는 거 아닐까.”
“그럼 나보고 투명인간, 아니 투명조류가 되란 얘기야?
죽어서 귀신이 되라는 소리네.”
“마음을 비우라는 이야기지.”
“치이, 결국 답이 없는 선문답이네.
일단 새가 새로 태어나려면 알을 깨고 나오듯이 난 병을 깨고 나올 거야.
병 속에서 태어난 새. 멋있지 않아?”
정효는 그저 허허 웃었다.
“정효 스님, 앞으로 전화 안 할 거야. 그러니 성불하세요.”
유미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정효가 급박하게 유미를 불렀다.
“유미야!”
“…….”
“어디에 있으나 병은 있고 어디에 있으나 병은 없다.”
“아유, 또 알듯 말듯한 소리.
난 중들이 하는 소리가 제일 갑갑해.
아유, 병 얘기 그만하자.
지금 그 말은 어디 있으나 병 걸리지 말고 건강하란 유익한 소리로 들을 게.”
“다 놓고 떠나도 곧 돌아오게 될 거다. 걱정 말아라.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다.”
어떻게 알았지? 신통력일까, 독심술일까.
유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정효의 목소리를 들으니 숨 쉬기가 좀 편해진 듯했다.
정효가 있어서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 이 기분은 무얼까.
오래전, 유미가 정효 몰래 프랑스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정효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효를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숨쉬기가 편했었는데.
어느새 하늘이 청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유미는 술이 깨지 않아 눈에 보이는 식당 민박집으로 가서 뜨끈한 온돌방을 빌렸다.
그곳에서 온몸의 뼈마디를 녹이듯이 오랜만에 자신의 몸을 달구었다.
자신을 가둔 유리병이 흐물흐물 녹는 환상을 보며 유미는 단잠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유미는 새로 태어난 새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홍두깨로부터 새 메일이 온 것을 발견했다.
시간을 보니 어젯밤에 보낸 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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