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파멸 혹은 연민-14
‘오랜만이지요? 그동안 이 홍두깨가 그립지 않으셨나요?
아마도 우리가 만날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운명이란 놈은 번개처럼 앞서 가니까요.
그 후에 우리는 천둥소리를 듣게 되지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이만 안녕!’
유미는 잠시 머리를 맞은 듯 멍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홍두깨라는 존재.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무언가 유미가 노는 물밑에서 잔뜩 뒤엉킨 수초처럼 모종의 끈들이 엉켜 있는 걸까?
그 인연의 끈들을 싹둑 자르고 이곳을 떠난다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까.
유미는 택시의 미터기를 새로 꺾고 출발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솟았다.
아니, 내가 어디를 가든 재부팅할 수 있는 노트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 홍두깨가 보낸 이메일을 다시 열어 보았다.
홍두깨는 이유진과 찍은 동영상 파일의 일부를 예절바른 메일과 함께 보냈었다.
이유진의 유령이 아니라면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유미는 망설이다 지완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어머, 유미야. 소식 들었어. 미술관 그만뒀다며?”
“박용준이 얘기하대?”
“아니. 이번 윤조미술관 전시에서 우리 아빠가 소장한 그림도 전시했잖아.
관장이란 여자가 전시 끝나고 그림 돌려보내면서 직접 아빠한테 전화했던 모양이야.”
“그렇구나. 그런데 넌 요즘 어떠니? 애들 아빠하고 일은?”
“이혼이라도 깔끔하게 하면 내가 복 받은 년이지.
시아버지 말로는 어디 가서 요양 중이라는데.
요즘 연락이 안 돼. 맘 비우고 기다리고 있어. 죽기야 했겠니?”
“그렇구나….”
“너도 미술관 그만두고 당분간 좀 쉴 거 아니니?
우리 여자들끼리 어디 여행이나 다녀올까?”
“웬일이니? 역시 애정보다는 우정이 위니? 그래, 생각해 보자.”
“이 나이가 되니 역시 20년 묵은 절친이 남자보다 낫다는 생각이야.
사랑에는 상처가 남지만,
우정은 세월 따라 믿음이 쌓이고 오래될수록 발효돼서 더 맛이 좋아지는 거 아니니.”
“그래 우리, 거의 20년이 다 돼가는구나.”
“20년 묵은 포도주면 굉장한 거다, 너.”
“누가 소믈리에 마누라 아니랄까 봐.”
“난 오래도록 그윽하고 맛있게 살 줄 알았지.
얘, 소믈리에 남편 소용없다.
포도주 맛만 볼 줄 알지,
포도주를 만들지는 못하잖니?
너 프랑스 와인 만드는 샤토 주인이나 내게 소개시켜 주라.”
“야, 그런 남자 있으면 내가 먼저 꿰차지.”
“ㅋㅋㅋ그러게. 그런데… 너 결혼 전선에 무슨 먹구름이라도 끼었니?”
“얘는 무슨 내 인생이 장마빛 인생이니? 먹구름이 끼게.”
“장밋빛 인생이 아니라 장마빛 인생? ㅋㅋㅋ….”
“원래 장밋빛 인생에는 결혼이란 단어가 없단다.
장밋빛 낭만과 연애가 있을 뿐이지.”
“예에, 언니! ㅋㅋㅋ.”
인규의 소식을 알아보려던 유미는 지완과 수다로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미가 지완을 멀리서만 바라보다
처음으로 말을 붙이던 날의 설렘을 유미는 기억했다.
그런데 지완 부부와의 인연은 왜 이리 묘한 걸까.
망가진 인규를 생각하면 유미는 가슴 한쪽이 아팠다.
이 모든 게 운명이었던 걸까?
그러자 아까 홍두깨가 보냈던 메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빛의 속도는 음속보다 빠르다.
그렇다면 이미 운명의 번개는 벌써 내리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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