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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파멸 혹은 연민-10

오늘의 쉼터 2015. 4. 6. 23:23

<344> 파멸 혹은 연민-10 

 

 

 

 

 

메모한 주소지의 아파트는 오래된 동네에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다섯 동짜리 소형 아파트였다.

 

유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파트는 복도식이었는데,

 

서너살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경주를 하느라 떠들썩했다.

 

510호는 끝집이었다.

 

만약 고수익이 집에 있다면 이런 소음을 견디며 책을 읽고 있다는 건데,

 

대단한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유미가 맨 끝집인 510호로 다가가자

 

머리를 단발로 자른 꼬마 여자애가 자전거를 타고 와서 물었다.

“아줌마, 우리 집에 가?”

“여기가 너희 집이니?”

“네.”

집주소를 잘못 적었나?

 

유미가 핸드백에서 다시 메모지를 꺼내려는데, 아이가 현관을 두들겨댔다.

“엄마! 누구 왔어!”

“아이고, 이 기집애야. 잠 좀 자자!”

안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여자는 자다 깼는지 묶은 머리가 반은 풀어져 있었다.

 

유미는 그것보다 여자의 터질듯 불룩한 배에 시선이 갔다.

 

여자도 유미를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혹시 고수익씨라고….”

유미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 사람 안 살아요.”

그럼 그렇지. 박용준, 이 자식 주소를 알려주려면 제대로 알려줘야지.

“아, 그럼 조인섭씨라고….”

“그런 사람 몰라요.”

여자는 유미의 말허리를 자르며 대답했다.

“그럼, 언제부터 여기 사신 건가요?”

여자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그리고 내가 왜 대답해야 되죠?”

“하긴 그러네요. 제가 집을 잘못 안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유미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여자가 등 뒤에서 날카롭게 물었다.

“고수익씨와는 어떤 관계예요?”

유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럼, 그 사람을 아세요?”

“여기 안 산다고 했지 모른다고 하진 않았어요.”

아니, 이건 뭐지?

 

그럼, 고수익의 아이와 만삭의 아내?

 

그럼, 이 여자에게 애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 예. 옛날 보험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인데요.

 

고수익씨 퇴사하면서 그분 고객들을 제가 승계했는데 처리할 일이 갑자기 생겨서요.

 

기록에 이 주소가 있기에….”

아, 대단한 순발력이다.

 

유미 스스로 감탄할 새도 없이 여자가 말했다.

“주소지는 여기 두고 있긴 한데 완전 홍길동이에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두 달 전에 왔었는데. 혹시 만나면 꼭 좀 전해줘요.

 

나 애 낳아야 되는데 어쩔 거냐고!”

“아, 예. 전할게요.

 

고수익씨가 결혼했는지는 몰랐네요.

 

거기다가 애까지 있는 줄은….”

여자가 픽, 웃었다.

“우리 오빠예요. 한 건 올리면 빌려간 목돈 갚는다고 그랬는데,

 

요새 전화도 안 받더라고요.

 

오빠지만 속도 겉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까 그 말 거짓말이죠?”

“네?”

“옛날 동료라고 한 말. 낯이 익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에요. 인상이 좋고 미인이라 그런가 보죠, 뭐.”

여자가 입술을 씰룩였지만 사진에서 본 적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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