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파멸 혹은 연민-11
여자는 유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했다.
사진발보다 실물이 더 낫군.
언젠가 고수익의 가방 속에서 나온 사진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유미란 저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한 번의 통화로 예상치 못한 이런 만남에서 전화 속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저러나 고수익으로부터는 두 달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다.
오유미라는 여자가 고수익을 찾는 게 좀 불안하긴 하다.
유미는 아파트를 떠나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최후의 청정애인이라 생각했던 고수익의 상큼한 살인미소 뒤에 저런 추악한 사생활이 있었다니.
사기꾼 같은 놈!
아니 사기꾼!
나를 속여 먹다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하지만 그가 내게서 돈을 갈취한 적은 없지 않은가.
몸을 갈취했다고 말하기도 그랬다.
유미는 고수익에게 한번도 몸을 미끼로 대가를 바란 적은 없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본 것도 없고.
다만 말 그대로 가진 것 없는 풋풋한 사내의 미소와 다정함에
스르르 무너진 몸과 마음에 화가 날 뿐이었다.
있는 놈들과의 거래 같은 섹스에 신물이 나서 갑남을녀의
낭만적 연애 같은 것에 목말랐던 걸까?
왜 고수익을 돈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남자라고만 생각했을까.
언제부터 내가 순수에 꽂혔나.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야.
그깟 놈 그냥 자르면 그만인 것을.
전화를 걸어 고수익의 만행에 대해 규탄하고 싶었지만,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이 요동을 쳤다.
고수익이었다.
“유미씨, 내일 볼 수 있다고 했지?
몇 시에 볼까?
유미씨 실업자 되니까 좋네.”
“…….”
“보고 싶어. 보자.”
“글쎄.”
“유미씨?”
“고.수.익. 너 누구니?”
“무슨 소리야?”
“이건 뭐 꽃뱀도 아니고, 꽃제비?
야, 제비, 너의 둥지는 어디냐? 지금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집에 있지.”
“집? 나 그리로 지금 갈게. 주소 대. 내비 찍고 가게.”
“집이 너무 지저분하고 누추해. 다음에 초대할게.”
“배불뚝이 네 마누라가 애 낳아야 되는데 어쩌냐고 꼭 전하라더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쭈! 피노키오는 거짓말하면 코가 커진다.
근데 고수익은 거짓말하면 거시기가 커지냐?
이게 입만 열면 죽자사자 거짓말이야?”
“뭐, 이게?”
“나 양평동에 갔다 오는 길이야.
나, 돈이 없어 허세 부리고 하는 그런 거짓말은 귀엽게 봐줄 수 있어.
고수익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난 네가 돈이 있어 좋아한 건 아니었으니까.
나름대로 철학이 있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런 사기는 너무 질이 안 좋잖아.
뭐 결혼하자구?
우리 둘이 결혼하면 재물이 붙는다구?
너를 혼인빙자 간음죄로 걸어버릴 수도 있어.”
“사기? 오유미, 말 다했어?”
“그래. 말 다했어.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넌 아웃이야.
말도 붙이지 마. 끊어.”
“잠깐!”
유미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수익이 소리를 질렀다.
“걔가 내 마누라라고 해?”
“오빠라 그러더라.”
“그래 오빠다, 어쩔래.”
“그러게 진작 실토하지. 찌질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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