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무정부주의자-12
“아, 네. 기사 보셨어요?”
강애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사님과 그런 사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그래요? 늘 보안을 유지했으니 오 실장님이 어떻게 아시겠어요.”
“개인적인 일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혹시 몸이 좀 아프신가 했어요.”
“몸에 이상이 있긴 하죠. 그래서 일이 이렇게 일사천리가 되기도 했고요.”
퍼뜩 직감이 왔다. 으음, 올 게 왔구나.
“짐작대로 그렇군요.
요즘은 뭐 혼수로 미리 그렇게 많이들 한다고 하더라고요. 축하해요.”
유미는 가슴이 미어지지만 그렇게 눙쳤다.
“오빠보다는 회장님이 너무 좋아하세요.”
강애리가 말끝에 웃음을 달았다.
“어련하시겠어요. 결혼 날짜는 잡으셨어요?”
“제가 유산기가 있어서 병원에서 안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고비는 넘긴 거 같아요.
아직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좀 괜찮아지면 배불러지기 전에 빨리 식부터 올릴까 생각 중이에요.”
유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애리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요.”
“네…”
“미술관 나가지 마시고 내 곁에서 나를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아이 낳을 때까지는 내가 제대로 미술관에 올인하기 힘들 테니까요.
회장님과 오빠에게 부탁드려 보려고요.”
황태자비에서 무수리로 전락하는 순간이 이럴까.
유미는 가슴을 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부탁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전화 드린 용건은,
이미 사직서는 준비되어 있고 저는 오늘부로 미술관을 떠나려고 합니다.
애초에 계획된 수순이었으니까요.”
“오 실장님,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저를 좀 도와주셔야죠.”
“물론 도와드려야죠.
강애리 관장님 밑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라도 말이죠.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르잖아요?”
“아니, 당장 어디 가실 데라도 있어요?”
“걱정 마세요.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나라 했는데,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곁에 없어도 행복하신지 늘 지켜보겠습니다.”
유미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몸이 떨려왔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몸 안에서 무언가 거침없이 폭발할 거 같았다.
어쩌면 비명이, 어쩌면 눈물이….
유미는 아프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어릴 적부터 힘들 때마다 부른 만화영화 ‘들장미소녀 캔디’의 가사가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기분대로라면, 귀를 틀어막고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절규를 토해내고 싶었다.
그래도 계속 몸이 떨려왔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포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절벽으로 내몰린 자의 공포….
유미는 사직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와 용준에게 사직서 처리를 부탁하고 미술관을 나왔다.
용준이 따라 나왔다.
“얼굴이 핼쑥해요. 제가 운전해서 집에 모셔다 드릴까요?”
유미는 손을 내저어 사양했다.
“괜찮아. 걱정 마.”
유미는 용준에게 미소까지 살짝 지어보이며 미술관을 떠났다.
동진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유미가 저녁을 먹고 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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