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무정부주의자-10
지완이 얼마 전에 한국에 돌아왔다며 유미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그런데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 인규가 탈출했다고 하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금시초문이었다.
가뜩이나 골치아파서 지완더러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으음, 지완이한테서 며칠 전에 전화 왔었어. 근데 둘이 만나는 걸 왜 나한테 보고해?”
“전 셋이 만나는 게 더 좋던데.”
용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됐다 그래.”
“쌤, 요즘 체질에 안 맞게 수절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안타까워요. 너무 고프시면….”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리고 용준, 너야말로 입조심해.
짜식이 귀엽다귀엽다 하니까 혀로 모든 기운이 다 몰렸니? 나가 봐.”
용준을 물리고 나자 기분이 좀 나빠졌다.
너무 고프시면? 내가 그렇게 궁해 보이나?
하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울 수야 없지.
섹스가 목적이 되는 삶은 이제 그만 안녕하고 싶다.
섹스를 고도의 수단으로 삼아 고급한 삶을 쟁취하고,
그만큼 삶의 질을 높이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것보다는
돈으로 멋진 삶을 향유하고 싶은 거나 마찬가지다.
동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라면 그 이유 말고 뭐가 있겠는가.
지루한 듯, 답답한 듯 변화 없는 며칠이 지나갔다.
내일이 바로 D-데이다.
유미는 덤덤한 듯 무신경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준이 어제 전한 말로는 본사의 회장실에서 동진과 회장이
크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풍문이 있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아마도 동진의 결혼 문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성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한다.
그럴수록 유미는 더 초조해졌다.
“대박이에요, 대박!”
용준이 유미의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외쳤다.
“무슨 일이야?”
“강애리가 병원에 입원한 거 같아요.”
“정말이야? 왜?”
“보안을 유지하는 거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어요.
그런데 유비통신에 의하면, 실연의 상처를 안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설이 있어요.”
“웬 자살? 유비통신이면 유언비어 아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 없어요.
그리고 우리 미술관 미스 정 동기가 윤동진 이사 비서실에 근무한다네요.
윤동진 이사가 요즘 강애리와 전화로 뭔가로 된통 다투고 나서는 죽상을 짓고 다닌대요.
어때요? 그림을 이어붙이면 그럴 듯하잖아요.
요즘 윤 이사님이랑 연락 안 하세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무슨 일일까?
윤동진이 뭔가 액션을 취하긴 하나 보다.
일단 그를 믿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저녁에 일찍 퇴근한 유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동태탕 국물에 소주 한 병을 다 비웠다.
바로 내일이면 그야말로 ‘쇼부’가 나는 날이라 생각하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다 가만 생각하니 갑자기 의붓아버지 조두식이 생각났다.
그 인간, 소주를 무척 좋아하던 인간이었는데.
외로울 때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는데,
엄마가 없으니 엄마의 남자가 떠오르는 이건 무슨 법칙이지?
그가 윤 회장과 조금이라도 안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걸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그 기대에 유미는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나 그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지.
그 인간이 필요할 때 코딱지만큼이라도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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