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무정부주의자-14
“유미, 제발 그러지 말고 내 얘길 들어 봐. 내가 그리로 갈까?”
“올 테면 와 봐. 이번엔 사진기자 불러서 사진 제대로 박아 주지.
우리 집에 자기 이니셜이 새겨진 수갑이랑 채찍이랑 증거물도 다 있고 말이야.”
동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얼마면 되겠니?”
“개새끼!”
유미가 부르짖고 전화를 끊었다.
동진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미친놈. 그전에 내가 필요할 때는 그렇게 연결이 안 되더니,
똥줄이 타니까 전화질을 마구 해 대다니.
유미는 휴대폰의 전원을 꺼 버렸다.
유미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욕실로 가서 옷을 활활 벗어부치고 샤워기 앞에 섰다.
술 취한 알몸은 불그레했다.
정육점의 고기가 따로 없구나.
이걸 짐승들의 아가리에 진상을 했었다니….
자신의 육체가 징그럽고 안쓰러워 보여 화가 났다.
썩을 몸뚱이. 유미는 찬물을 튼 샤워기 아래에 서서 비누를 칠한
이태리타월로 자신의 몸을 벅벅 문질렀다.
몸에 떨어지는 찬물 대신 눈에서는 더없이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정신이 든 유미는 거실 장식장의 아래 칸 문을 열었다.
그야말로 거기에 모든 증거물이 다 들어 있었다.
그동안 수집한 윤 회장의 자료는 물론, 동진의 취향을 여실히 까발리는
물건이 든 서류 가방을 꺼내 박스에 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이렇게 정리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아래 칸에는 유미의 자료가 들어 있다.
유미가 포르노를 찍었던 비디오테이프가 두 개.
윤 회장 집에서 찾아온 비디오테이프도 함께 있었다.
목숨을 걸고 비디오테이프를 찾아왔건만 강애리의 임신으로 한 방에 나가떨어지다니.
이 오유미가 그런 원초적인 무기를 쓸 생각을 못하다니.
아이를 원하진 않았다 할지라도 임신을 핑계로 얼마든지 비열한 방법으로
위협을 할 수는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쿨했던 거야.
그러나 유미는 그런 자신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애리에 대해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여우 같은 기집애. 순진한 척 일부러 작정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거야.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윤동진 아닌가.
그렇게 쉽게 임신할지 몰랐다고? 유미하고는 그렇게 해도 한 번도 안 생기던 아이가…?
무슨 임신이 확률게임인 줄 아나?
나야 자궁 내 피임 장치를 했으니 그렇지.
윤동진, 왜 피임을 안 한 거야? 콘돔은 뒀다 풍선 불었나?
그 옛날 콘돔 쓰던 시절에 한동안 유미는 콘돔에 든
남자의 정액을 버리지 않고 콘돔 입구를 묶어 라벨을 붙여 모아 둔 적이 있었다.
무슨 어긋난 심보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그것들의 샘플도 어딘가에 모아 뒀을 텐데….
유미의 일기, 수첩 등도 딸려 나왔다.
그리고 지난번에 받아 두었던 엄마의 유품 상자가 나왔다.
엄마의 일기와 노트, 사진이 들어 있는 상자. 유미는 다시 한번 그 상자를 쓸어 보았다.
엄마,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아도 나, 엄마보다 더 멀리 가지를 못했네.
자유를 외치며 살았어도 내겐 자유가 그저 사막이었어.
하지만 동진과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결혼을 원했지만 버림받았을 뿐이고.
엄마, 우리 팔자는 왜 이러냐.
유미는 엄마의 청순한 여고 시절의 사진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엄마가 남긴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유미는 지난번에 보았던
이상한 그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얼굴이 도려진 남자의 가족사진.
그 남자 옆에 강보에 싸여 얼굴을 알 수 없는 아기를 안고 있는
부인과 낯선 사내아이의 사진.
사랑하는 남자가 따로 이룬 가정의 가족사진을 보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만약 동진과 애리가 아이를 낳아 가족사진을 보내온다면?
'소설방 > 유혹' 카테고리의 다른 글
<336> 파멸 혹은 연민-2 (0) | 2015.04.06 |
---|---|
<335> 파멸 혹은 연민-1 (0) | 2015.04.06 |
<333> 무정부주의자-13 (0) | 2015.04.06 |
<332> 무정부주의자-12 (0) | 2015.04.06 |
<331> 무정부주의자-11 (0) | 2015.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