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무정부주의자-6
“무슨 뜻이야?”
“전에 비디오테이프 건도 그렇고.
이번 사진도 그렇고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는 거 같아.”
“참 비디오 확인했어?”
“아니, 아직.”
“회장님한테 가서 확인해 봐.”
유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모든 게 누군가의 음해야.
우리 사이를 파괴하는 그런 걸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또 서로를 신뢰하기 위해서도 결혼이라는 운명공동체가 최선이지.”
“으음, 알았어.”
동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달 말까지 나오라는데, 어떡해야 해?”
“한 열흘 남았네. 내가 결단할 때까지 좀 기다려.”
“더러워서 내일이라도 당장 때려치우고 나오고 싶은데.”
“그러든가. 그만두고 네가 어디 좀 조용히 가 있으면 어떨까?”
“내가 어디 처박혀서 해변의 여인이나 산장의 여인이라도 되면 좋겠지?”
유미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암튼 이번에야 말로 남자다운 자기의 모습을 보여줘.”
“웁스! 날 훤히 밝기 전에 얼른 나가야겠다. 이러다 또 나갈 때 사진 찍히는 거 아냐?”
동진이 시계를 보더니 옷을 입고 서둘렀다.
유미는 그런 동진을 더 이상 붙잡지 않고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채우고 거품목욕제를 풀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을 만들어 욕조의 거품 속에 파묻혔다.
커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자신의 몸을 감싸는 풍성한 거품을 바라보았다.
동진에게 채찍을 휘둘렀던 오른팔과 어깨가 무지근했다.
만약 평생 이렇게 살다가는 곤란하겠는걸.
일단 동진이 내 사람이 된다면 그의 취향을,
그의 우유부단한 기질도 바꾸어야 한다.
거품이 서서히 꺼질 때까지 바라보며 유미는 동진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이 비누거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동진에 대한 호기심과 그가 가진 부에 대한 동경이 유미를 흥분하게 했다.
그 흥분이 사랑이라고 믿었고, 아니 믿으려 했다.
그래야 사랑에 빠질 수 있으므로. 하지만 이제 유미는
동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믿음은 상대적이다.
사랑 또한 상대적이다.
아니 동진뿐 아니라 저 자신마저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서글픔을 느꼈다.
어쩌면 동진을 믿지 않는다기보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랑이 아니라면….
유미는 회사에 출근한 며칠 동안 사직서를 써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아무렇지 않게 강애리를 바라보는 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쫓겨나는데, 미술관을 차지하고 YB그룹 후계자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할 나이 어린 라이벌이 눈에 고울 리는 없다.
그러나 회사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강애리가 결근을 했다.
미술관 일이라면 미술사 서적까지 탐독하며 열정을 보이던 강애리였는데.
유미는 핑계 삼아 강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장님,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강애리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너무 피로해요. 병원에 좀 들러봐야겠어요.”
“요즘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시다 보니 무리하셨나 보네요.
내일이 작고화가전 오픈인데 내일은 꼭 나오셔야죠.
오늘 디스플레이는 제가 책임지고 잘할게요.”
“고마워요. 아이 참, 난 오 실장이랑 끝까지 가고 싶은데
회사 측에서 왜 그런 조치를 취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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