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악어와 악어새-8
정희와 통화를 하고 나서 유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맹인 안마사로 밥을 먹고사는 정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윤 회장에게서 입질이 온 게 우스웠다.
검은 안경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는데도 그 영감,
보는 눈은 있어서… ㅋㅋ 늙어도 남자는 남자다, 이거지.
어쨌거나 윤 회장을 향한 통로 하나는 확보된 셈이다.
윤 회장은 아직 직접적으로는 유미를 압박해 오지 않았다.
너구리 작전인지 주위에 연막탄을 터트려 유미로 하여금 기어나오도록 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
윤동진과의 접촉을 직·간접적으로 막고, 권력을 동원해 강애리를 이용해서
유미가 미술관에서 제 발로 기어나가길 바라고 있다.
문제는 가능하면 빨리 윤 회장에게 접근해서 역으로 그에게 재갈을 물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굴 속에 갇힌 무기력한 너구리 꼴이 되어 캑캑거리며
제 발로 기어나와 항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강애리였다.
애리는 언뜻 보기에는 그저 발랄한 차림이었으나,
대충 껍데기만 벗겨 팔아도 1억은 훨씬 넘는 차림새였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밍크 조끼에, 명품 백에, 걸고 있는 장신구만 봐도 그 정도 견적은 나오리라.
유미는 자신의 초라한 입성에 순간 주눅이 들었으나 강애리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셔서 놀랐네요.”
“저 다음주부터 출근하는 거 모르셨어요?
오늘은 그냥 한 번 들러 본 거예요.”
“다음주부터요?”
유미는 그 부분에 대해 보고나 지시를 아직 받은 적이 없다.
깊은 소외감과 비릿한 분노가 느껴졌다.
“오 실장님도 보고 싶었고요.”
“정말요?”
“제가 책임자로서 인수인계할 것도 있고, 당분간은 오 실장님이 저를 좀 도와주셔야죠.
우리 두 사람이 관계가 좋아야 저의 첫 데뷔작이 성공하지 않겠어요?”
“첫 데뷔작?”
“네, 첫 데뷔작. 앞으로 경영 일선에 나가는 저의 첫 작품이잖아요.
제 전공 작품의 첫 테이프를 끊는 게 여기 미술관이니까.”
“네, 하긴… 경영학이 전공이시니까.”
“그러긴 해도 예술 경영은 예술적인 감식안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요. 잘 부탁해요.”
애리가 예의 그 보조개를 옴폭옴폭, 움직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첫 데뷔작. 앞으로 경영일선에 나갈….
유미는 하룻강아지라 깔봤던 애리의 다부진 포부를 느꼈다.
아무 그늘 없는 순진무구한 저 자신감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갱도에서 자신의 육체를 연료로 태워가며 욕망의 불씨를 사르면서
헤쳐 나온 여자와 태생부터 아무런 자의식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자신감으로 빛을 발하는 여자.
유미는 순간, 애리의 보조개를 깊은 송곳으로 찌르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제가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은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는지….”
“아니, 오늘은 그냥 한 번 둘러보고 직원 분들하고 자연스레 만나고 싶었어요.
저 회장님하고 저녁 식사 약속이 있거든요.”
애리가 살짝 소리 죽여 말했다.
“그러세요? 회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죠.
참 출장 중인 윤동진 이사님도 다음주에 취임해서 첫 출근하는 거 아시나요?
그분이 미술관의 실질적인 최고 상사이신데.”
“그럼요.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는걸요. 다음주 주말에 귀국하세요.”
애리는 유미를 빤히 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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