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우정과 애정-5
그렇게 수선을 피우던 인규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유미가 지완과 함께 만나 인규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한 때문일까.
“황인규씨가 이러면 주변 분들이 다치고 아파요.
그거 아시죠? 이분 좀 취하신 거 같은데 택시 불러서 집으로 태워 보내 주세요.”
유미가 지폐를 꺼내 경비에게 주었다.
인규가 경비를 뿌리쳤다.
그리고 유미를 바라보았다.
희번득, 묘한 광채가 도는 눈빛이었다.
지완이 두려워할 만도 하겠구나. 유미도 속으로는 그 눈빛에 놀랐지만 태연하게 마주 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인규의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맹수의 눈빛이 저럴까.
제 앞에 다가오는 운명을 아는 짐승의 눈빛이 저럴까.
유미는 순간, 가슴을 면도날로 긋는 듯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유미를 그렇게 응시하던 인규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현관을 향해 허청허청 걸어 나갔다.
경비도 물러나고, 직원들의 웅성거림과 용준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투덜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유미는 방으로 돌아왔다.
인규의 그 눈빛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힘없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도….
유미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용준이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또라이…. 길 가다 똥 밟았다 생각하세요.
길 가다 돈을 줍는 날도 있지만 똥을 밟는 날도 있잖아요.
재수 없는 날 말이죠.
아까 오후에 카페에서 잠깐 보자고 점잖게 전화가 왔더라구요.
사실 지완씨랑 미리 입을 맞췄거든요.
지완씨가 오늘 오전에 전화해서 작전을 말해줬거든요.
지완씨와의 관계는 잡아떼고 오 실장님 애인하기로….
그 남자 그때는 수긍하는 거 같더니
어느새 회사까지 와서 오 실장님한테까지 그럴 줄 몰랐어요.
지완씨 말마따나 만나 보니까 정말 또라이 같네요.”
용준이 뭐라고 핑계를 대며 계속 말을 했다.
“그만 나가 줘.”
유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기분이야 더럽겠지만….”
용준이 눈치 없이 계속 얘기하자 유미가 눈을 번쩍 뜨고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
“그만 나가 달라 그런 말 안 들려?”
그제야 용준이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좀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지완이었다.
아마도 용준과 통화를 했을지 모른다.
유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완에게 화가 나 있다기보다는 그냥 인간들이 다 싫었다.
전화를 안 받자 문자가 곧이어 들어왔다.
‘유미야, 정말 미안해. 그 사람이 너한테까지 가서 그럴 줄은 몰랐어.
기분 나쁘겠지만 그냥 잊어버려. 오늘 밤 내가 술이나 사면 좋겠는데 연락 줘.’
유미는 핸드폰의 전원을 길게 눌러 꺼 버렸다.
그러고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가슴속이 답답했다.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이 인생을 어찌 풀어가야 하나.
엉킨 실을 싹둑 잘라내 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는 없는 걸까.
미칠 수 있는 인규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미는 연달아 담배를 두 개피나 피웠다.
가늘게 이어지는 실낱같은 담배연기가 마치 가슴속에 뭉친 털실 같은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외로움과는 또 다른 고통이다.
사람들 각자는 신으로부터 각각 어려운 인생문제를 숙제로 부여받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그 문제는 누구도 풀어 줄 수 없으며 정답은 오로지 신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
그런데 그 정답이란 것도 죽을 때나 되어야 알게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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