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좁은문-19
“네. 그런데 강애리는 서류가방 알아요?”
“걔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통나무던데.
통나무는 좀 심하고 딱딱한 플라스틱 마네킹 같더라고.
몸도 그렇고 상상력도 그렇고….”
“상상력, 중요하죠.”
“내가 유미, 당신을 좋아하는 건 당신의 탄력 있는 몸도 좋지만, 상상력이야.
스펀지처럼 탄력 있는 당신의 정신, 상상력이야.”
“그래요.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으면 뭐든지 편협할 수밖에 없어요. 섹스도….”
까마득히 잠의 나락으로 빠져드는데 동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여기 뭐가 떨어져 있네.”
서류장에 가방을 넣던 동진이 말했다.
그러나 유미는 잠에 빠졌는지 소파 아래로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서류장에 낡은 쇼핑백이 들어있었는데 그 바깥에 사진과 무슨 편지 같은 게 떨어져 있었다.
사진은 옛날 흑백 가족사진 같은데 너무 작아서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는데다
누군가의 얼굴이 도려져 있었다.
편지는 펼쳐보니 연서인 것 같았다.
잠깐 일었던 호기심도 유미가 몸을 뒤채자 금방 사라졌다.
“잠이 쏟아져… 채찍질 너무 힘들…어…서….”
동진은 얼른 그것을 쇼핑백에 주워 넣고 서류가방과 함께 서류장의 문을 닫았다.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리는지 진동음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벗어놓은 옷가지 사이에서 울리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유미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액정화면을 보니 ‘돼지’라고 떠 있었다.
돼지? 돼지가 누구야?
동진은 돼지처럼 뚱뚱한 푸줏간 주인이 떠올라 웃었다.
소파에 길게 누운 유미의 흰 몸이 스탠드 불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그때 동진의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오빠, 내일 모레가 아빠 생신인데 오빠 우리 집에 초대할게요.
특히 엄마가 오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엄마보다 오빠를 더 그리워하는 애리는 이제 저만의 애리가 아니네요.
내 안에 오빠가 늘 있는데 난 왜 자꾸 오빠가 그립죠?’
동진이 휴대폰을 끄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애리는 이제 저만의 애리가 아니네요.
그 문장이 자꾸 밟혔다.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돌아온 강애리는 스물여덟살이다.
유미가 족집게 무당처럼 집어냈듯이 미술관 오프닝 날에 강애리와 술을 마셨다.
착잡한 심정이기도 했고 강애리의 동진에 대한 일편단심의 애정이 애틋해서 호텔에 함께 들었다.
강애리는 의젓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애리는 처녀였다.
스물여덟살이 될 때까지 어떻게 처녀를 사수할 수 있었을까.
강애리같이 철저하게 보호 속에서 키워진 여자는 그런 걸까?
동진은 그 후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여자가 나 같은 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건 서로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동진에게 최초로 몸의 문을 연 강애리는
그 후 거침없이 동진에게 빠져들었다.
숙맥인 강애리와 그렇게 얽혀버렸으니 정말 결혼이라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는 거의 그렇게 의중을 굳힌 것 같았다.
그런데 유미에게 결혼서약서를 쓰다니.
사실 본마음은 만약 강애리와 결혼을 하더라도 유미를 잃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돈이 얼마가 들든지 유미를 결혼보다 더 실질적인 내연의 관계로 곁에 두고 싶다.
그러나 결혼만큼은 유미와 하는 게 썩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유미를 잡아둘 수 있을까.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주식을 정리해서 유미와 아무도 없는 외국으로 나가서 살까?
동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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