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4
“역시 안 넘어가는데? 스님, 졌습니다요.”
유미도 장난스레 깔깔 웃어 넘겼다.
사람의 인생이 길지 않을 텐데 불과 십여 년 전의 이 남자는
유미의 몸을 목숨을 걸고 탐하던 남자였다.
유미는 그때의 진호도 아스라이 그립지만,
지금의 정효도 기대고 싶은 단 하나의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유미가 정효에게 말한다.
“그냥 나 좀 안아줄래? 그냥 품에….”
정효가 팔을 벌려 유미를 안았다.
유미는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는 쌉싸름한 햇녹차의 향기가 났다.
정효 또한 잿빛 장삼 자락으로 유미의 몸을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좋다. 너무 편해.”
유미가 꿈꾸듯 말했다. 정효도 유미의 몸을 아기 재우듯 토닥였다.
“내 애기… 힘들었구나….”
내 애기…. 정효는 유미를 안을 때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청년티를 벗지 못한 젊은 남자였던 진호가 유미를 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유미는 그 당시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갑자기 설움에 겨운 아이처럼 울음이 목줄을 타고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유미는 아프게 울음을 삼켰다.
“내 애기, 힘들었구나.
요즘 늘 꿈에 보여서 네 마음자리가 편치 않구나 했다.
마음에 걸려 있는 모든 번뇌 다 내려놓아라.
그깟 욕망, 티끌보다 못하다. 마음의 참 평안을 찾아야지.”
유미는 후두둑, 눈물을 그의 잿빛 승복 소매에 떨어뜨렸다.
마치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어깨가 떨려오더니
삽시간에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이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정효는 그런 유미를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짖었다.
“세상 모든 일이 끝이 있으면 좋겠어. 언제가 끝인지 알면 좋겠어.”
유미가 울면서 말했다. 그가 내일 해가 뜨면 사라지는 바람이라 해도 오늘 밤만은
그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었다.
상수도가 있으면 하수도가 있어야 하는 법.
사람 또한 누구나 그래야 한다. 오랫동안 유미는 자신의 슬픔을 처리할 줄 몰랐다.
다만 정효스님이 몇 년에 한 번씩 바람처럼 다녀가면 바람결에 그 슬픔을 실어 보내곤 했다.
세상의 어떤 남자도 그것을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윤동진도, 황인규도, 박용준도, 아버지 같은 김 교수도….
정효는 유미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눕히고 자신도 유미의 옆에 누웠다.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옷을 벗고 있으나 입고 있으나 의미가 없었다.
세상에서 유미가 유혹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의 남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효는 남자가 아니라 일종의 솔메이트라고나 할까.
잠깐 옛 시절이 생각났다.
“진호야, 정말 미안해. 예전엔 내 남편에게 걸려서 무지하게 맞기도 많이 하고
나 때문에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하더니….”
“아마 전생의 업이겠지.”
“너와 난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남녀쌍둥이? 아님 아버지와 딸? 여왕과 충신?”
“그래, 그 사람은 잘 지내? 효수. 그리고 네 딸 설희….”
“응, 잘 지내. 설희가 벌써 고 2야.”
“그렇구나.”
“정효스님은 행복해?”
유미의 뜬금없는 물음에 정효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느 날 내가 몰래 프랑스로 도망갈 때
나는 내가 결국 이 남자를 죽이는구나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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