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2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있는 잿빛 실루엣.
“진호!”
유미는 스위치를 올림과 동시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진호가 뭐냐. 진호가.”
“어이구, 그럼 니가 진호지, 진주냐?”
유미가 그에게 달려들어 앉아 있는 그의 머리통에 반갑게 입술을 쪽 맞춘다.
갑자기 눈물 나게 그가 반갑다.
유미는 삭발한 그의 잘생긴 머리통을 볼 때마다 꼭 중이 될 팔자를 타고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만큼 남자는 승려라는 직업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정효라는 법명을 놔두고 속가의 이름을 왜 부르니?”
“어렵잖아. 정효. 정효 스님. 발음이 너무 어려워.”
“너 웬 곡주를 이렇게 마셨냐. 독한 냄새가 나는구나.”
“땡중이 술 냄새는 잘도 맡네. 술 한잔 할까?”
“아니, 됐다.”
“인마,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육보시도 하고 그래야지.
도가 다 저잣거리에 있는 거야. 알아?”
정효는 그런 유미를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하긴 정효 시님은 그런 거라면 진즉 하산할 때가 됐쥬.”
유미가 입술을 실룩이며 비아냥댔다.
“그나저나 뭔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고매한 선승이 납시셨나?”
“전화다 문자다 여러 번 한 건 누구고?”
“흥, 언제는 눈이나 깜짝 했남?
그렇게 보고 싶다고 집 비밀번호 다 가르쳐주고
언제든 아무때나 한번만 들르라고 애원해도 몇 년 동안 얼씬도 않더니.
정효 스님도 이젠 늙나 보다. 외로운 거지?”
유미의 앙탈에 아랑곳없이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요즘 이상하게 한번 오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냐? 너의 기운이 좋지가 않구나.”
유미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힘들어서 그렇지 뭐. 사는 게 힘들어서….”
정효는 환자를 들여다보듯이 차분하게 유미를 응시했다.
“으음, 상심이 큰 거 같구나. 나무관세음….”
“언제 갈 거야? 가지 마.”
“기약 없는 몸이 무슨 약속을 하랴.”
“며칠 만이라도 내 곁에 있다 가,
스님. 안 그럼 염주랑 목탁이랑 다 숨겨놓는다.”
“하루면 어떻고 며칠이면 어떻냐.
일각이 여삼추고 삼추가 일각인 것을.”
“제발 땡중스러운 그런 말 좀 하지 마.
나랑 있을 때는 옛날의 진호로 돌아가 줘.
장난도 잘 치고 눈물도 많고 음담패설도 잘하던….
뭣보다도 나를 사랑했던….”
아아, 이 남자와 한때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말로 어여뻤던 그런 날들이 지난날에는 있었다.
유미는 파르스름한 두상에 잿빛 승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를 다시금 바라보며
인연의 덧없음과 잔인함을 생각했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지나고 보니 사랑인 것을.
너무나 외롭고 불안할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가 유미는 고마웠다.
유미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목에 빗금처럼 수없이 그어진 흉터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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