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수난기 9
“…그렇다니까, 걔네 기지로 쳐들어가면서 오버로드를 한 마리도 안 끌고 들어갔다니까.
그런데 입구 바닥에다가 지뢰를 잔뜩 심어 놨지 뭐야.”
혜영이 정혜에게 신이 나서 말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한데
봉수는 취미가 없어 그런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순간 자신이 늙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혜가 소주잔을 홀짝이며 진실로 궁금한 듯 물었다.
“뭐가 그래서야, 끌고 간 놈들 다 죽였지.
얼마나 원통한지 요즘 들어서 1주일 만에 처음 진 거였거든.”
장수나 화련 역시 흥미롭게 듣고 있었고 관심이 없는 사람은 봉수와 애란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술자리는 이미 패로 나뉘어졌다.
“너 미네랄 늘 많이 남겨두지? 그러면 너 진다,
미네랄 쌓이자마자 바로바로 유닛 건설해야 한다니까.”
“그러게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알 포인트 맵만 걸리면 깨진단 말야.”
봉수는 맥없이 잔을 홀짝였다.
신입사원들을 보는 게 마냥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 나중에 함 같이 해볼래? 나는 테란인데.”
“테란이랑 싸우면 절반 정도 이기는 거 같더라.”
“나는 요즘 골프 게임해. 이게 또 재밌더라.”
장수도 한 몫 끼어 거들었다.
그때 봉수의 종아리 부근에 다리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닿았다.
여자의 다리였다.
아무래도 공정혜인 듯했다.
그녀는 실수인 듯 얼굴에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떠드는 데에만 열중했다.
봉수는 슬그머니 그녀의 다리 사정권 안에서 떨어졌다.
이야기하는 데 열중하느라 자신의 다리가 어디에 가서 닿았는지 모를 수고 있겠다 싶었다.
봉수는 별 할 말도 없고 오줌도 마려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을 막 끝내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공정혜가 봉수 앞에 불쑥 나타났다.
“너무 우리 이야기만 하죠? 이제 다 끝났어요.”
정혜는 봉수를 달래듯 어깨를 다독이기까지 했다.
애란의 눈길이 의식되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자신은 아직 결혼한 남자도 아니었으며 애란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봉수가 자릴 돌아가려고 할 때 공정혜가 손을 덥석 잡았다.
“아까 회의실에서 말이에요.”
공정혜가 봉수의 손을 잡고 구석진 자리로 이끌었다.
요즘 애들은 싫다 좋다가 너무 분명해서 탈이야.
이런 애들이랑 어떻게 맞춰 사나. 봉수는 공정혜에게 끌려가면서 내심 그런 걱정까지 들었다.
“팀장님!”
공정혜가 봉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술 마시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뽀얀 젖가슴이 보였다.
봉수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치마를 말아 쥐고 있었다.
허벅지가 깊숙이 보였다.
봉수는 눈 둘 곳이 없어 팀원들이 앉아 있는 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보세요.”
벌써 술에 취했나? 공정혜는 두 손으로 봉수의 얼굴을 감싸쥐고는 자신 쪽으로 바로 잡았다.
“팀장님 회의실에서 말이에요,
제가 입은 속옷이 정말로 선배님이 디자인 한 건가 보고 싶다고 속삭이지 않으셨어요?
제가 아부하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보여드릴게요.”
그녀는 봉수의 눈이 뚫어질 정도로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봉수는 팀원들이 앉아 있는 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공정혜가 끌고 온 자리에서는 팀원들 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속옷을 보여달라고 말한 건 병달이었다.
봉수는 괜히 억울했다.
신입사원들이 들어온 첫날부터 괜한 봉변을 당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랬죠?”
공정혜가 봉수를 다그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원더우먼의 귀라도 달렸단 말인가? 봉수는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실은 저… 꼭 팀장님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공정혜가 봉수에게 가까이 다가와 낮게 중얼거렸다.
“제 몸에 팀장님이 디자인한 옷이 얼마나 잘 맞는지 말이에요.”
술에 취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가 폴폴 풍겼다.
“보실래요?”
봉수가 손을 젓기도 전에 공정혜는 이미 치마를 벌렁 뒤집어 올렸다.
거웃을 아슬아슬하게 감춘 하와이안 시리즈 팬티가 나타났다.
옅은 핑크색이었는데 아랫부분 절반이 거웃으로 검었다.
봉수는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길이 저절로 그녀의 아랫도리로 향했다.
공정혜는 치마를 들춘 채 뒤로 돌았다.
두 개의 뽀얀 엉덩이가 눈부시게 빛났다.
봉수는 하마터면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가져갈 뻔했다.
“어때요? 정말 기막히게 잘 맞죠?”
공정혜는 봉수 앞에서 치마를 든 채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가 돌 때마다 엉덩이가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봉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아랫도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여자란 정말 각자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든 양규자는 나름의 원숙함과 요염함이 흘렀고,
애란은 수수함과 섹시함이 가득했던 반면 지금 봉수 앞에서 ‘생쑈’를 하고 있는
공정혜는 주체할 수 없는 싱싱함과 탄력이 흘렀다.
도대체 얘가 왜 이러지?
봉수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엉덩이를 만져보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막 그녀의 엉덩이로 손을 가져갈 때 송혜영이 두리번거리며 나타났다.
“아유, 애!”
송혜영이 급히 다가와 공정혜의 어깨를 세차게 때렸다.
그리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치마를 끌어내렸다.
“어, 혜영이구나. 왜 그래? 나 팀장님한테 하와이안 시리즈가 얼마나 내 몸에 잘 맞는지
구경시켜 드리고 있었는데.”
능청을 떠는 건지 아니면 약간 돈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팀장님 이해하세요,
정혜가 원래 술 마시면 어디서든 훌훌 벗는 버릇이 있어서 제가 찾아 나선 거거든요.
아무튼 정혜 때문에 가끔 미치겠어요.
그렇다고 물론 아무 남자 앞에서나 그러는 건 아니구요.
팀장님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이렇게 속옷 패션쑈를 한다니까요.
술 취해서 그러니까 팀장님이 이해해 주세요.
정혜가 이래도 실력도 좋고, 시간 지나면서 술이 깨는 희한한 아이라
나중은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거든요.
너는 정말, 팀장님이 얼마나 당황하시겠어.”
혜영이 다시 한 차례 공정혜의 어깨를 쳤다.
“너는 너무 착한 게 흠이야.”
공정혜가 혜영을 끌어안았다.
“팀장님 얼른 오세요.”
두 여자가 뒤돌아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갔다.
비슷한 키와 몸매, 그리고 볼륨. 두 여자가 앞으로 얼마나 많이
봉수를 번뇌에 빠지게 만들지 걱정이 앞섰다.
팀원들이 2차로 자리를 옮기며 문제가 생겼다.
‘뮤즈’라는 술집 앞에서 제지를 당한 것이었다.
“글쎄, 안된다니까요.”
제지를 당한 이유가 봉수와 박장수가 나이 많이 먹어 보인다는 이유였다.
“이십대 후반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지만 삼십대는 정말 안 됩니다.”
문지기는 제법 눈썰미가 있었다.
하지만 애란도 삼십대인데 여자는 예외였던 모양이었다.
봉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박장수는 화가 나는 지 펄펄 뛰었다.
“야, 정말 내가 주민증 까야 믿겠어?”
“주민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냥 필 상으로 삽십 대다 싶으면 그냥 안 되는 겁니다.”
“무지 기분 나쁘네. 왜 내가 삼십대로 보인다는 거야?”
박장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였다.
“오빠는.”
그때 공정혜와 송혜영이 문지기의 팔짱을 착 꼈다.
“우리 걱정 돼서 따라온 오빠들이야. 오빠 정말 융통성 없다.”
두 여자가 문지기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으로 어깨를 밀고 하체로 문지기의 다리를 감쌀 정도로 달라붙었다.
“정말 안 되는데 우리 물 흐려지만 장사가 안 된다구요.”
“오빠도 참, 우리 오빠들 오빠가 보기에만 그렇지 실은 얼마나 잘 논다고.
그리고 오빠를 보내면 우리도 그냥 갈 건데? 이런 몸의 여자들을 그냥 보낼 거야?”
공정혜는 치마를 팔랑거리며 한바퀴 돈 후 다시 문지기에게 달라붙었다.
“오빠, 들여보내 주라, 엉?”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교를 부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 참.”
공정혜와 송혜영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드디어 뮤즈에 입성했다.
봉수도 박장수와 마찬가지로 은근히 화가 났다.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싶기도 했다.
뮤즈는 언젠가 송화랑 한번 가 봤던 락카페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무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사람들로 들끓었다.
내부는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땀 냄새 그리고 여자들의 화장품 냄새로 진동했다.
음악과 조명에 맞춘 사람들의 물결이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좋죠?”
공정혜가 봉수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물었다.
음악 소리 때문에 도통 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이런 데 못 들어오게 하는 이유가 뭐야? 봉수는 자신이 화를 낸 이유가 싱거웠다.
겨우 쟁반 만한 스탠딩 테이블에 맥주 일곱 병이 배달되어 왔다.
테이블 앞으로 모이자 서로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이렇게 모여야만 이야기가 가능할 정도로 음악 소리가 크기도 했다.
“여기서 한 바탕 춤추고 나면 술도 깨고 정신이 더 말짱해 지거든요.
정혜는 여길 왔다가 다시 술 마시러 가면 그때부터는 안 취해요.”
송혜영이 봉수의 귀에 악을 쓰듯 대고 말했다.
송혜영과 공정혜는 매우 친한 사이인 듯했다.
봉수가 귀를 송혜영에게 두고 있는 사이 느닷없이 공정혜가 봉수의 팔을 잡고 무대 쪽으로 끌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가 좁아 앞 뒤 좌우 사람들과 몸이 닿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런데 마치 이런 걸 즐기러 온 사람들처럼 서로 마구 비벼댔다.
공정혜는 뒤로 돌아선 채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봉수 아랫도리에 가깝게 붙인 후 비벼댔다.
‘정말 미치겠네.’
봉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팀원들이 하나 둘 무대로 나오더니 제각기 자리를 잡았다.
누구보다 신이 난 사람은 병달이었다.
좌우 앞뒤로 거의 반라의 여자들에게 둘러 쌓여 은근히 몸을 비벼가며 춤을 췄다.
“팀장님 정말 노땅이네. 무슨 춤을 그렇게 춰요.”
공정혜가 봉수의 귀에 가까이 대고 핀잔을 주었다.
“뭐, 어떻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추는 거지.”
“그래도 이왕이면 즐겁게 춰야죠, 팔만 흔들어서 즐거울 수가 있겠어요?”
그러더니 공정혜는 봉수의 손을 잡고 동작을 더욱 크게 놀리기 시작했다.
너무 격없이 구는 게 불편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애란이 춤을 추며 힐끔힐끔 봉수를 훔쳐보며 재미난다는 듯 웃었다.
환경은 어차피 사람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노래가 끊어지지 않고 네 곡쯤 흘렀을 때 봉수 역시 적당히 흥이 붙었다.
박장수나 공정혜 송혜영은 물론 병달이나 화련 그리고 애란은
이미 무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기에 휩쓸려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일할 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놀 때는 아주 확실하게 놀자는 게 제 주의에요.”
공정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봉수에게 말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건 좋은 일이었다.
특히 매사 우유부단했던 자신의 성격 때문에 뭔가를 두고 망설였던 봉수로서는
부러운 성격이기도 했다.
그래, 놀자. 내 몸이 시키는 대로 추자.
봉수도 음악에 몸을 맡겼다.
어떤 정형이나 반복도 없이 몸을 흔들었다.
“잘 추시는데요.”
이번엔 송혜영이 다가와 칭찬을 했다.
“정말입니까?”
“뭐, 춤이라는 게 별 게 있을까요?
그냥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들며 되는 거지. 그런데 괜히 빼는 사람들 있잖아요.
무게 춤이나 추고 말이에요.
사실 난 그런 사람들은 일할 때도,
또~ 섹스할 때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봉수는 그건 편견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세상은 어차피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규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뮤즈에서 나와 보니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상쾌했다. 봉수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의 얼굴에도 땀 흘린 뒤의 상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선배님, 이대로 쫑내기엔 아쉽잖아요.”
병달이 은근한 말투로 봉수를 쳐다봤다.
병달은 공정혜와 송혜영에게 정신이 팔린 듯했다.
“그만 하지, 내일 출근들도 해야 하고.”
“10시도 안됐네요.”
의외로 공정혜가 병달을 거들고 나왔다.
“운동을 했으니까 에너지를 보충해야죠.”
송혜영 역시 병달을 두둔했다.
봉수는 애란을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뭐, 저도 찬성인데요.”
봉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봉수를 제외한 여섯 사람은 눈에 보이는 맥주집으로 뛰다시피 들어갔다.
봉수는 그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요즘 회사에 큰 변동이 있다면서요?”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고 있는 봉수를 향해 양규자가 물었다.
그녀는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오른쪽 무릎을 접어 다리를 세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원들이 상당수 감원이 된 반면에 저희 부서는 충원이 됐습니다.”
봉수는 양규자에게 회사 이야기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양규자는 강 실장의 부인이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봉수의 강 실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비춰지면
좋아할 리 없겠다는 계산이 들었다.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특히 원단을 수입해서 쓰는 회사들로서는 고육지책이었겠죠.”
역시 그녀는 고용주의 입장인 듯했다.
봉수는 붓질하는 데에만 열중할 뿐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강 실장이 차갑고 지나친 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워낙 이성적인 사람이라 나도 가끔은 싫을 때가 있으니까.
그 집안 남자들이 다 그래요.
시아주버님부터 시동생들 심지어 시부모들까지.
특히 시부모님은 누구와도 같이 사는 걸 원하지 않더라구요.
죽을 때까지 당신 두 분이 같이 살면 좋고 안되면
남는 분은 실버타운에나 들어가 사신다면서 시아주버님이 결혼할 때부터 아주 못을 박았대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경우이긴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우린 만나면 다들 서먹해요.
모두 개인 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서로 자주 만나지도 않구요.”
양규자는 집안 얘기를 한탄하듯 말했다.
도무지 그런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여자라 봉수로서는 의외였다.
“오늘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갤러리에서도 기분이 영 우울하더니.”
봉수는 순간 양규자가 생리중이 아닌가 싶었다.
송화도 생리를 전후해서 우울해 하곤 했던 것이다.
“참, 에어컨은 잘 돌아가죠?”
봉수는 그제야 양규자가 에어컨을 선물했다는 걸 기억했다.
그녀가 작업실로 들어설 때까지도 오로지 그릴 일에만 몰두해 있었던 터라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가 깜빡했네요. 에어컨 고마웠습니다.”
봉수가 잠시 붓을 놓고 양규자를 쳐다보았다.
이젠 그녀의 몸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모델로 인식하는 순간 나체의 여자는 그저 정물이었다.
“뭐, 그림 잘 나오게 하긴 위한 투자죠.”
양규자가 무대에서 일어나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 봉수에게로 다가왔다.
“잘 되가나요?”
양규자는 봉수의 바로 곁에 다가와 섰다.
캔버스엔 그녀의 몸 윤곽이 잡혀져 있었다.
“봉수씨는 붓질할 때 보면 신들린 사람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그림도 잘 나올 거 같네요.
다음 주면 제 모습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겠는데요?”
벌거벗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봉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느닷없이 손을 들어 봉수의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을 닦아주었다.
에어컨을 틀어놓기는 했지만 몰두해서 작업을 해 그런지 땀까지 흘렀던 모양이었다.
양규자의 손이 이번엔 반대편 관자놀이로 향했다.
순간 봉수는 양규자가 모델이 아니라 벌거벗은 여자로 보였다.
“봉수씨는 우리 그이랑 너무 다른 거 갼틸? 너무 인간적이랄까?”
양규자의 젖가슴과 농염해 보이는 그녀의 아랫도리가 봉수의 눈앞에 환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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