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수난기 6
봉수는 망설이지 않고 강 실장의 방문을 열어 젖혔다.
강 실장은 봉수의 방문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의자를 가리켰다.
강 실장의 얼굴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애란과 화련, 병달은 비서실에서 대기했다.
“박 팀장이 무슨 일로 왔는지 아는데, 설마 내게 충고하러 온 건 아니겠지?”
봉수는 입이 얼어붙어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양규자가 이런 인간과 같이 사나 싶었다.
“미리 말하건대, 감원은 나보다 훨씬 더 윗사람의 지시로 이루어진 거고.
되물릴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하루아침에 어떻게…”
“한 가지 더 알려줄 게 있습니다. 만약 중국 진출을 실패하면 우린 오성으로 통합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겠죠?
오성으로 갈 수 있는 인원은 불과 5분의 1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이젠 나머지 사람들의 목숨은 바로 개발2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몇 명 감원했다고 발끈해서 나를 만나러 올 일이 아닐텐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감원 대상자들은 이미 지원을 받아 놓은 상태였고
뭐 위로금도 넉넉하게 주기로 이미 결정이 난 상태지요.
아, 물론 오늘에서야 자신이 감원 대상이라는 걸 안 사람도 있긴 있지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겠습니까?”
봉수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한 가지 더!”
강 실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행여 그 놈의 얄팍한 의리 때문에 개발 2부 사람들이 다 사표를 쓰면 다른 팀원들로 구성을 하겠죠.
그러면 처음부터 또 다시 시작하는 꼴이 될 거고.
그러면 또 그만큼의 경비 절감과 인원 감축이 뒤따른다는 사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한 둘이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려면 너희들이 일을 해라라는 뜻이었다.
강 실장이 이토록 치밀한 인간인지 몰랐던 게 후회스러웠다.
그에게 돈을 받아 회식 자리에서 먹었던 술들이 모두 넘어올 것만 같았다.
봉수는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봉수는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실장님, 꼭 감원을 했어야 했습니까?”
“이번 분기에 K은행에서도 1,500명을 감원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재정이나 기타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봐도 우린 K은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고
형편없는 기업입니다.
살아 남기 위한 고육지책이고 사장님의 오기 때문에 그 시기가 너무 늦어진 것입니다.
모두 망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다수를 살리는 게 나은 선택이 아닐까요?”
강 실장은 창 밖을 내다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더 이상 그와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봉수는 맥 빠진 다리를 끌고 그의 방에서 나왔다.
세 사람도 이미 강 실장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였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만일 이 일을 그대로 넘어가면 나중에 우리들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병달이 분노에 찬 탄식을 쏟아내며 씩씩거렸다.
병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우린 노조도 없잖아요.”
“노동부에 고발을 할까요?”
“그럴 필요 없을 겁니다. 강 실장이 이미 손을 다 써 놨을 테니까.”
봉수는 자신만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 실장이라면 이미 일어날 문제들에 대한 대비책까지 세워놓았을 사람이었다.
회사 전체 직원을 감원시킨다 해도 눈 하나 깜빡일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에 있는 진국에게선 이미 짐작했다는 답변이 왔다.
“결국 우리만 죽어나게 생겼군요.”
병달은 금방이라도 사표를 낼 듯이 굴었다.
분노와 의리 때문에 사표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회사에 사표를 내면 강 실장이 어떤 꼼수를 쓰고 나올 지 몰랐다.
게다가 실업률이 늘어나는 판국이라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 있을 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강 실장은 개발2팀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을 꼴이었다.
봉수는 무엇보다 강 실장의 부인과 계약한 일이 걱정이었다.
더 바빠질 것은 뻔한데 계약을 했으니 그림도 그려야만 했다.
봉수는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람은 제법 불었지만 햇빛은 따가웠다.
봉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또 담배 값이 오른다니 담배도 끊어야 할 판이었다.
“무슨 고민이에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애란이 봉수의 뒤에 와 서 있었다.
“그냥 이것저것 모두 고민이 됩니다.”
“봉수씨, 어려워도 전시회 포기하지 마세요.”
“이미 계약을 해서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봉수씨가 포기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뭐 그만이죠.
그래도 포기하지 마세요. 어차피 회사 생활 마흔 넘어서까지 할 건 아니잖아요.”
애란이 손을 내밀었다. 담배를 달라는 뜻이었다.
“담배도 피웠습니까?”
봉수는 애란에게 담배를 건네며 슬며시 웃었다.
봉수는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진국을 좋아하면서 타는 속을 담배로 달랬을 터였다.
“내가 봉수씨를 위로해 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네요.”
애란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사실 강 실장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 많아요.
저도 처음 입사했을 때 실장님 생김새나 그 카리스마에 반해서 한때는 좋아했었죠.
그때 신입 여사원들 중엔 강 실장한테 몸 바친 애들도 수두룩해요.
그래도 다들 찍소리 한번 못했어요.”
봉수는 애란의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그 카리스마에 끌려 다닐 걸 생각하니 진저리가 났다.
“진국씨는 뭐래요?”
애란이 진국과 주고받은 메일에 관해 물었다.
“진국인 워낙 낙천적인 놈이잖아요.
배포도 크고 배짱도 두둑하고. 원래대로 밀고 나가자고 하죠.”
“그래야겠죠?”
애란의 마음도 심란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시작한 판이니까 잔치를 벌려야죠.”
“오늘 한 잔 할까요?”
봉수는 슬그머니 허공으로 향한 그녀의 눈길을 쳐다보았다.
여자로선 지, 친구로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그녀의 청이 싫지 않았다.
송화에게선 여전히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선배도 이제 술꾼 다 됐습니다.”
“스트레스 풀 길이 없잖아요. 나는 봉수씨한테 위로 받고 봉수씨는 저한테 위로 받고.”
나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진국이를 사랑한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워낙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터라 오늘이 월급날이라는 걸 잊고 있었는데
화련이 경리부에서 급여명세서를 받아왔다.
“갈수록 태산이구만.”
급여명세서를 살펴보던 병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여기 보세요. 의료보험료가 또 올랐잖아요.”
“샐러리맨이 봉인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잖아.”
봉수는 급여명세서를 접어 수첩에 끼워 넣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불합리한 거 아닙니까?
제 친구 녀석은 아버지한테 떼를 써서 커피전문점 하나 차렸는데 순수익이 월 천만 원이 넘는 답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의료보험료는 내가 내는 거에 절반도 안 돼요.”
“억울하면 병달씨도 사업해요.”
화련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했다.
“이거 오늘 기분 더러워서 한 잔 해야겠는데요.”
병달은 또 술타령이었다.
화련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문제는 봉수와 애란이었다.
둘이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월급날인 줄 몰랐던 것이다.
“노 대리님 오늘 한잔 해야죠?”
“그, 그래요.”
애란이 슬쩍 봉수의 눈치를 봤다.
봉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래도 오늘 밤부터는 강 실장의 와이프가 모델 노릇을 하기로 되어 있어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저녁을 겸해 1차 회식이 끝난 후 봉수는 가방을 챙겼다.
“어, 2차 안 하시게요?”
병달이 봉수의 팔을 잡았다. 화련도 봉수의 팔을 단단하게 잡았다.
“팀장님이 안 가면 우리도 2차 안 가요.”
“우리 당분간만 봉수씨 봐줘요.”
애란이 봉수의 사정을 눈치 채고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일주일 중 월요일과 수요일만 봐주면 됩니다.”
애란과 봉수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병달과 애란이 눈치를 챘다.
“그럼 전시회 하기로 계약을 하신 겁니까?”
“그렇게 됐어.”
“선배님 어쨌든 축하 드려요. 이건 인원이 새로 보충되어도 우리만 알고 지내는 거죠?”
화련이 봉수를 쳐다보며 윙크를 했다.
“그래주면 고맙죠.”
“쩝, 그러면 우리끼리만 2차 해야죠.”
병달은 술이 취한 척 애란과 화련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곤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봉수는 왠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번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봉수는 택시를 잡아타고 작업실 겸 자취방이 있는 서교동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8시 40분이었다.
첫날부터 양규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와 집 앞에 이르렀다.
집 앞 가로등 아래에 주차된 고급승용차의 문이 열리더니 화사한 차림의 양규자가 내렸다.
“일찍 오셨네요.”
양규자는 야들야들한 느낌의 블라우스와 몸에 착 달라붙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갤러리에서 볼 때는 머리를 묶었는데 지금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어 더 젊어 보였다.
“일이 좀 일찍 끝나서요.”
봉수는 그녀를 보자 문득 아침에 본 강 실장이 떠올랐다.
차갑고 냉정한 사람. 과연 강 실장에게도 따뜻한 구석이 있을까 싶었다.
봉수는 양규자를 데리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대학 시절까지 포함해서 근 10년 가까이 산 집이었다.
집주인이 젊은 환쟁이들에 대한 이해가 깊고 무던한 편이라
지금껏 딱 한번 딸이 시집갈 때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했을 뿐 더 이상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런 저런 연유로 봉수는 그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음, 정말로 그림 그리는 사람 작업실답네요.”
양규자는 봉수의 작업실로 들어서며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음, 봉수씨 삶의 의미나 목적 같은 게 느껴져요.”
“작업실만 보시고도 그런 게 느껴집니까?”
봉수가 소파를 가리켰다.
“좀 덥죠?”
봉수가 말하지 않아도 작업실은 후텁지근했다.
봉수는 선풍기를 켰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몰려왔다가 멀어졌다.
“에어컨 없으세요?”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좋은 작품이 나오기 위해선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작업실 분위기는 좋지만 여름이나 겨울엔 애 좀 먹었겠어요.”
“가난한 환쟁이들이 그렇죠, 뭘.”
양규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도 과연 강 실장 부인을 모델로 써도 괜찮을 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풋풋하고 좋아요,
어쩌면 작업 환경이 열악해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온 것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젊을 때 이야기예요.
이미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의사가 분명하고 매우 합리적인 여자. 강 실장을 닮은 구석이었다.
“큐레이터가 그런 것도 염려해 주는 직업입니까?”
봉수는 냉장고를 열어 고향에서 보내온 매실즙을 꺼냈다.
물과 희석해서 먹으면 맛이 제법 좋았다.
슈퍼에서 파는 기호음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건강음료였다.
봉수는 매실주스를 만들어 양규자에게 건넸다.
“매실입니다.”
“봉수씨는 큐레이터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뭐, 화가 발굴하고 전시회 기획하고 그런 사람 아닌가요?”
“맞죠. 음, 이거 맛있네요.”
양규자가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큐레이터가 화가를 발굴하려면 보통 안목으로는 안되고,
말하자면 대단한 눈썰미에다 안목과 철학적인 깊이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세요?”
봉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래야겠죠.”
“저는 그림 보는 안목을 높이기 위해 전세계에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아름답다는 곳, 유명하다는 곳, 심지어 위험하다는 곳도 가지요.
언젠가 인도 기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석달이나 있었죠.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고,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그림을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큐레이터를 직업 거간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많은데 과거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달라요.
정말로 해박하지 않으면 갤러리 하나 잡아먹는 건 우습죠.”
양규자는 자신의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봉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만큼의 자부심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듯했다.
강 실장의 집에서 보았던, 바람날 것 같은 아줌마가 아니었다.
프로 중의 프로였다.
“시작할까요? 샤워실은 있죠?”
양규자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사모님 집처럼 훌륭한 샤워실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사모님 소리 듣기 싫어요.
앞으로 규자씨라고 불러 줄래요?
봉수씨랑 나이 따져봐야 몇 살 차이 안 나잖아요.
뭐 사회 밥 10년은 친구로 지낸다면서요.”
양규자는 서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이라고 해야 블라우스와 치마가 전부였다.
가슴을 모아주는 브래지어에 트렁크 타입의 옆선이 굵은 햄 팬티를 입고 있었다.
둘 다 연한 핑크 빛이었고 면이 얇아서 유두는 유두대로 거웃은 거웃대로 도드라져 보였다.
“실은 다른 남자 앞에서 옷 벗기는 처음이에요.”
양규자의 얼굴에 약간 홍조가 들었다.
하지만 봉수는 그 말을 믿어야 할 지 의문이었다.
매사 자신만만한 태도도 그렇고 예전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 보여주었던 행동을 보더라도
프리섹스주의자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이긴 하지만 강 실장 역시 회사 내 뿐만 아니라
거래처 여직원들과도 거리낌없이 관계를 맺는다고 했다.
뭐, 비도덕적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부창부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규자가 마지막 남은 옷을 벗었다.
봉수는 그녀가 서 있는 쪽의 조명을 켰다.
송화가 모델을 서기 시작한 뒤 한쪽 구석을 무대로 만들었고 조명도 따로 설치해 두었던 것이다.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렸던 손을 그녀가 거두었다.
그리스 어부들이 바다에서 비너스 상을 건져냈을 때
그 몸매의 완벽함을 보고 질렀을 탄성과 감동이 봉수의 가슴속에도 잔잔하게 일었다.
강 실장 집에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보고 얼른 고개를 돌렸을 땐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는데
그녀의 몸은 다빈치가 와서 보더라도 100점을 줄만한 완벽한 균형의 몸이었다.
꼿꼿한 유두, 처지지 않은 엉덩이, 적당한 근육이 느껴지는 허벅지, 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팔뚝,
너무 희지도 너무 그을리지도 않은 피부, 중심을 가리고 있는 무성한 숲.
봉수는 한 동안 그녀의 몸 구경을 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강 실장은 이런 부인을 놔두고 왜 바람을 피는가 싶을 정도였다.
원래 인간이란 게 자기 떡은 큰 지도, 맛있는 지도 모르는 법이라지만 양규자는
그런 범주에서 충분히 벗어난 여자였다.
송화의 몸이 풋풋하고 싱싱했다면 양규자의 몸은 농염하고 완벽했으며 짜릿했다.
“구경만 할 거예?”
양규자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봉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봉수씨, 구경만 하고 있으면 확 덮치는 수가 있어요.”
“네?”
“그만 쳐다보고 작업 하시라구요. 민망하게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