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안개 속으로-1
오랜만에 평소보다 집에 일찍 들어온 인규는 지완이 밤 외출을 했다는 걸 알았다.
술약속이 갑자기 취소됐지만,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고 온 탓인지 집안은 엉망이었다.
두 아들 놈이 라면을 끓여 먹었는지 주방이 지저분했다.
이 여편네가 애들 저녁도 안 먹이고 나갔나?
그러나 부엌은 그렇다치고 안방으로 들어오니 가관이었다.
옷을 고르느라 옷장 문이 열려 있었고 옷과 속옷들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몹시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반쯤 열린 서랍장에는 그동안 인규가 한번도 보지 못한 야한 속옷 세트들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보자 인규는 ‘아아, 이 여자가 바람이 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거의 확신처럼 들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에 인규는 위스키를 꺼내 스트레이트로 석 잔을 마셨다.
알딸딸해졌지만 원하는 잠은 오지 않고 더 정신이 말똥해졌다.
만약 지완이 자신을 배반한다면 인규는 유미에게 배반당하는 것보다 더 상처가 클 거 같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면 더 아프고 화가 나는 법이다.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떡을 놓치는 것보다 꽉 쥔 떡을 놓치게 되는 게 훨씬 약 오르는 법이니까.
그만큼 인규는 지완이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여자라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도 흔들릴 수 있는 건가….
갑자기 굳건한 가정이 타히티의 지진 같은 대재앙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미와 통화라도 해 볼까 싶었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속에 열불은 나지만 이상하게 기운이 빠져 침대에 누워 있는데 지완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무슨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공기가 살짝 흘러들었다.
남자의 향기임을 직감했다. 인규는 잠든 척했다.
살짝 샛눈을 떠보니 안방으로 들어오던 지완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상기돼 있다.
손에는 무슨 쇼핑백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지완이 인규가 깰세라 살금살금 욕실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완이 샤워를 하는 동안 인규는 그녀의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의심할 만한 전화번호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쇼핑백을 열어 보니 웬 셀린느 가방이 나왔다.
무심결에 가방을 뒤적여 보는데 무언가 툭하고 떨어졌다.
그건 작은 카드였다.
‘지완씨에게 어울리는 가방이라 한참 전부터 찜해 놨었어.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반품 교환을 하다 보니 이제야 선물하게 됐어.
내 사랑을 이 가방에 한 아름 담아 보내.
내가 애완견처럼 이 가방에 들어가서 늘 당신 몸에 붙어 다니면 좋겠어.
키스! 쪼오~~옥^^ 당신의 팻 욘사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장이라도 욕실로 달려가 남자의 흔적을 열심히 지우고 있을 마누라를
패고 싶은 충동이 불꽃처럼 일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황망한 가운데 인규는 가방을 원상태로 돌려놓은 다음에 옷을 걸치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멍한 상태에서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야심한 그 시간에 갈 데가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몰다 보니 유미의 아파트 단지에 다다르게 됐다.
김유신의 애마가 따로 없구나.
인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차에 와인이 한두 병 있을 것이다.
오늘 밤 유미와 실컷 취하고 싶었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인규는 휴대폰을 꺼내 유미에게 전화를 하려 했다.
그러나 주머니에 휴대폰은 없었다.
급히 나오느라 집에 두고 온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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