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타인의 취향-8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유미를 보았다.
그리고 유미에게 다가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실크 원피스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유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가 넋이 나간 듯 유미의 몸을 바라보았다.
“씻고 올게요.”
유미가 얼른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흰색 레이스 슈미즈를 입고 나왔다.
윤 이사는 약간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씻으세요.”
“나중에….”
그 말을 하고나서 그도 옷을 벗었다.
뉴욕출장 때 웹캠으로 보았던 그의 몸이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났다.
오오, 피렌체의 다비드여…
유미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그의 탄탄한 아랫배를 만져 보았다.
그림의 떡이 아니다.
바로 먹을 수 있는 초콜릿이다.
“유미씨,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윤 이사가 뜸을 들였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요.”
“아니, 부탁할 거 없이 오늘은 이사님이 원하는 대로 맘대로 다 하세요.
전 오늘 밤 완전 무저항주의자니까요.”
“그건…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
“날 사랑할 준비가 되었죠?”
“네.”
“그럼 저도 준비가 되었어요.”
뭐야? 영화 찍듯이 ‘레디(Ready)’를 외쳐야 하는 거야?
그의 입에서 ‘레디고!’를 들어야 시작할 수 있는 건가?
“침실로 먼저 들어가 있어요. 금방 갈게요.”
유미는 침실로 들어가 주름 하나, 티끌 한 점 없는 침대시트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가 씻고 오는 모양이다.
방문을 열고 그가 들어왔다.
그런데 알몸인 그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까 집에 들어올 때 술과 가방을 들고 오기에 잠깐 의아했었다.
아마도 중요한 돈이나 문서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보다.
“얘기한 적 있죠? 내가 좀 까다롭다고요.”
“그러게요. 섹스하면서 서류가방 들고 오는 남자 처음 봐요.”
“유미씬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야 멋진 남자라고 생각하죠.”
윤 이사가 유미의 흰 슈미즈를 벗겨냈다.
“유미씬 흰색 속옷이 안 어울려요.”
“그럼 어떤 게 어울려요?”
“검은 색이 더 어울려요.”
“검은 색은 창녀의 색이라고 하잖아요.”
“창녀는 섹시하죠. 유미씨도 섹시하고요.”
듣기에 따라서 약간 기분이 상하는 말이다.
“오늘은 저를 좀 즐겁게 해줘요.”
그 말을 듣고 유미가 윤 이사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흥분되기 시작한 그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 검은 색 가방을 침대로 가져왔다.
그런데 가방을 열자 거기서 나온 것들은…! 처음엔 체인이 나왔다.
그 다음엔 가죽 채찍이 나왔다.
밧줄도 나왔다.
수갑도 나왔다.
유미는 물건들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입을 점점 더 크게 벌렸다.
아아, 이 남자…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머리끝이 쭈뼛 섰다.
유미는 겁에 질려 윤 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방에서 그 물건을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흥분이 극에 달해 있는 듯 보였다.
그가 씨익, 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유미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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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캐릭터·강렬한 삽화… ‘잔잔한 유혹’에 빠지다
우리 시대 욕망의 지형도를 파격적이면서도 경쾌하게 담아낸 소설가 권지예씨의 문화일보 연재 소설 ‘유혹’이 15일 100회를 맞았다. 지난해 11월3일 “맛있는 섹스는 있어도 맛있는 사랑은 없다”는 감각적 애피그램으로 시작된 소설은 주인공 유미의 냉정하면서도 뜨거운 사랑과 성을 흥미롭게 펼치며, 중반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유혹’의 즐거움은 유미라는 새롭고 개성적인 캐릭터이다. 지적이면서 아름다운 그는 미대 강사이자 문화센터 사랑학 강사이며, 라디오 인기 작가인 동시에 파워 블로거이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은 유미는 개인을 억압하는 제도, 사회 통념과 윤리로부터 독립적이다. 사랑에 자유롭고 성에 적극적이며 유혹의 기술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전략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통용되는 기준이란 권력도 돈도 제도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욕망이다. 예를 들어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그녀는 “능력 있는 현대여성에게 (이상적 연애란) 일과 사랑을 함께하기 위해 책상다리처럼 안정감 있는 넷, 아니 옛날 무쇠솥의 다리처럼 셋까지도 나쁘지 않다. (나는) 늘 최소한 다리 셋은 고수하고 있다”는 식으로 대담하다. 하지만 유미의 욕망은 이기적이거나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쿨하면서도 뜨겁게 얻어낼 뿐이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직업, 사랑, 자기 성취를 거머쥔 이 골드 우먼은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독립적이다. 미국 드라마 등에서 종종 봐온 캐릭터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라며 “이같은 캐릭터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한국 사회에서 곧 모습을 드러낼 진화된 캐릭터”라고 말했다.
한편 팔색조같은 유미가 상대하는 남성들은 이 시대의 다양한 남성상을 반영한다. 독특한 성적 취향의 윤 이사, 유미와 연애 중인 유부남 인규, 유부녀에게 붙어살면서도 유미의 매력에 끌리는 유약한 용준, 부인과 사별한 뒤 혼자 살아가는 60대 김 교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유미를 붙들어두려는 박 PD, 트랜스젠더인 유미의 첫사랑까지. 다양한 이들은 위태로운 중년 남성, 노인의 고독, 광범위한 88만원 세대, 권력을 과시하는 속물 등 우리 현실을 보여준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돈, 권력, 젊음, 혹은 성적 매력으로 유미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유미의 중력에 끌려 주위를 맴도는 위성일 뿐이다. 이같은 요소로 무장한 ‘유혹’은 작가가 마음먹고 독자와 소통하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도록 쓰는 작품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추리와 스릴러 기법을 동원해 궁금증을 자아내는 복선을 깔고, 매회 감각적 문체와 과감한 묘사를 동원해 흥미로운 복합장르의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소설은 경쾌하게 통념을 깨고, 현실 사회에 대한 성찰을 전하며 우리 문학의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소설 유혹 줄거리… 37세 이혼녀 유미의 ‘냉정과 열정’
열여섯살된 딸을 둔 서른일곱의 이혼녀 유미. 그녀는 사랑과 일에 언제나 냉정과 열정을 유지한다. 자신의 대학동기인 지완의 남편 인규와 연애하며, 그에게서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랑과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흠모하는 대학원 제자이자 후배인 용준을 지완에게 소개해 주면서도, 외로운 어느 날 용준을 찾기도 한다. 노교수의 고독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라디오 PD와는 계약 관계를 갖기도 한다. 이렇게 쿨한 연애를 즐기던 유미는 최근 아르마니가 잘 어울리는 ‘완벽남’인 윤 이사에게 끌리고, 그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유혹’은 크게 두가지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유미의 쿨하고 뜨거운 연애기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유미의 인생성장기이다. 유미의 사랑과 욕망이 매회 작은 파도를 이룬다면, 유미 성장기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큰 파도이다. 이는 유미의 감각적인 사랑 이야기 사이사이에 슬쩍 슬쩍 내비치며 큰 흐름을 만들어간다.
현재 유미의 과거는 몇가지 기본적인 사실만 알려졌을 뿐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최근 누군가 유미의 집에 들어와 유미의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를 훔쳐가고, 한밤중에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는 등 새로운 반전을 맞고 있다.
“내안의 억압들도 터지는 느낌”
“지금까지 유미를 통해 인간의 성과 욕망을 단편적이고 경쾌하게 그려왔다면, 중반을 넘어서면 지금의 유미를 있게 한 욕망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해나갈 예정이다. 물론 이 역시 긍정적이고 경쾌하게 써나갈 것이다.”
‘유혹’의 작가인 권지예(50·사진)씨는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숨겨진 비밀과 사건이 부딪히는 보다 큰 이야기를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예고했다.
“유미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지금의 유미를 만든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유미가 어떤 길을 선택해,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고, 앞으로 어떻게 나갈 것인가를 이야기하겠다”는 작가는 결국 “그 마지막에서 진정한 성과 사랑은 무엇인가, 또 인간의 삶에 있어 욕망은 얼마만큼 필요한 것인가 등을 탐구하겠다”고 말했다.
권씨는 지난 4개월여를 돌아보며 “처음 시작할 때는 신문연재라는 대중적 코드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라며 “성적 팬터지를 경쾌하게 나열하면서도 동시에 성과 욕망이 인간 삶과 인간성에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는 이중의 숙제 때문에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이를 “큰 물줄기와 잔물결의 조화”라고 설명한 작가는 “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쓰다보니, 내 안에 억압된 부분들이 터지는 것 같은 속시원한 느낌이 들었다”며 “나름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그래, 나도 즐기자”라는 생각으로 ‘유혹’을 써내려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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