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73) 첫사랑-10

오늘의 쉼터 2015. 2. 15. 12:16

(73) 첫사랑-10

 

 

 

 

첫사랑인 수민과 밤을 보내고, 어머니의 연미사에 참석하고 나서 유미는 서울로 올라왔다.
 
열차를 타고 오는 내내 20여년 전의 소녀가 떠올랐다.
 
그 소녀는 지금 어디로 사라진 걸까.
 
불행한 어머니의 그늘에서 숨죽이고 살던 창백한 소녀.
 
딸의 몸속에 흐르는 자유롭고 뜨거운 피가 마치 뱀파이어의 피라도 되는 듯
 
여겼던 어머니. 하지만 욕망은 풍선과 같다.
 
누르면 누를수록 다른 곳으로 팽만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결국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풍선이 터지고야 말았다.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과 육체의 욕구를 느꼈던 이종사촌 오빠 수민.
 
서로의 몸은 가장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은밀한 욕망의 학습교재였다.
 
어쩌면 그것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었다.
 
남자의 몸을 알고 싶었다.
 
세상이라는, 욕망과 유혹의 학교로 진학하기 전에 배워야 할 알파벳 같은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사랑의 밑그림은 그런 시절에 그려진다.
 
하지만… 수민은 ‘사랑의 배신자’였던 셈이다.
 
유미는 왠지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모든 첫사랑은 사랑의 고향 같은 것인데….
 
이제 사랑에서마저도 고향을 잃은 느낌이다.

처음으로 열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던 일이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유미는 비린내 나는 가난한 고향에서,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옥죄는 엄마에게서 늘 도망치고 싶었다.
 
유미를 세상에 내놓는 걸 두려워한 엄마였지만,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결국 동의했다.
 
서울로 가서 여대생이 되는 것은 소녀시절 엄마의 꿈이었기 때문일까.

서울로 떠나는 날 아침, 엄마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쓰다만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기장에는 눈물로 얼룩진 몇 개의 문장이 보였다.

‘유미가 서울로 간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유미는 큰물에 나가 노닐어야 할 물고기다.
 
아니면 천륜이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유미와 동갑인 Y의 딸도 아마 여대생이 되었겠지.
 
아아, Y…. 평생을 그의 숨겨진 여자로 산다 해도 나는 괜찮아…
 
하지만 언젠가는….’

일기는 거기서 멈춰 있었다.
 
Y…? Y는 누구일까?
 
천륜? 조씨, 신씨 그리고 Y….
 
엄마의 남자들 중에서 Y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일까?

그러나 그때 서울행 무궁화열차 속에서 유미는 다짐했다.
 
아버지라는 남자, 그런 거 필요 없다.
 
이제 어른 여자가 될 것이었다.
 
아버지라는 남자의 존재가 필요 없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자….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고향을 벗어나 자유롭고 멋진 서울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고향을 떠난 유미는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밴 어머니의 억압의 사슬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서울여자가 되기 위해선 억센 부산 사투리마저도 혀에서 뿌리를 뽑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곧잘 하고 그림에 재주가 있던 유미는
 
어렵지 않게 여자대학의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유미는 어머니에게서 입학금과 사글세 보증금만 받고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촌닭인 갓 스물의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사투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레스토랑의 서빙 알바였다.
 
그러다 지도교수의 제안으로 실기시간의 모델일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도교수의 눈에 유미가 띄었기 때문이다.
 
유미 자신도 모르던 능력과 ‘끼’를 검증받은 것은 바로 그 사건 때문이다.
 
 

'소설방 > 유혹' 카테고리의 다른 글

(75) 첫사랑-12  (0) 2015.02.15
(74) 첫사랑-11  (0) 2015.02.15
(72) 첫사랑-9  (0) 2015.02.15
(71) 첫사랑-8   (0) 2015.02.15
(70) 첫사랑-7   (0) 201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