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24) 팔색조-3

오늘의 쉼터 2015. 2. 1. 12:17

(24) 팔색조-3

 

 

 

 

 


원고를 다 써서 박 피디의 메일로 보내자 얼추 강의 시간이 다 되었다.


어제 박 피디가 전화를 해 왔다.


가을 개편 철을 맞아 우리도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유미는 조만간 전화를 드리겠노라고 했다.


칼자루를 쥔 박 피디는 슬쩍 칼을 칼집에서 들썩여 보인 것인데….


그가 멋지게 칼을 뽑을 기회를 주어야 할 텐데.


박 피디 같은 사람은 영악해서 쓸데없는 선물이나 뇌물 같은 증거가 남는 향응은 딱 질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나면 몇 년에 한 번씩 연예계 비리 운운하며 피디들을


이 잡듯 잡아들이곤 하니까.


그저 그가 갖고 있는 약간의 권력을 환기시켜 주면 된다.


바보가 아닌 이상, 증거와 소문을 만들 싹수를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방송을 연장해야 하나…


요즘엔 왠지 유미는 원고를 쓰는 일에 싫증이 자주 났다.


블로그 관리도 그렇다. 콘텐츠 개발도 그렇고 포스팅하는 것도 그랬다.


지금까지 천만 명 이상이 다녀가고 하루에도 만 명이 클릭하는 파워 블로그이며


현재 유미의 비즈니스에 큰 도움을 주고 있긴 하지만.


그 드넓은 인맥을 생각하면 뿌듯해하지 않을 수 없긴 해도,


그 세상에서 수많은 이웃과 일촌이 존재해도 유미는 외로웠다.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를 관계 맺는 현상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좋은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처럼 유미는 또 다른 단미의 존재로 사는 것이 흥미로웠다.


단미의 존재를 먼저 알고 난 박 피디도 유미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참 팔색조 같은 여자야.”

 

“고마워요. 칠면조보단 낫네요.”

 

농담으로 그렇게 받았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팔색조라…,


일곱 가지 색의 아름다운 깃털로 싸인 신비로운 새.


갈색의 머리는 보호색으로, 빨간 바지를 입혀 놓은 듯


가슴과 엉덩이 쪽의 선명한 붉은색은 경계색으로 이용하는 새.


혼자 다니기 좋아하는 고고한 새.


그렇게 보호색과 경계색으로 유미는 단미의 이미지를 이용하곤 했다.

 

책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강의실로 올라가는데 박용준이 저만치 보였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무표정하다.


다른 때 같으면 수줍은 얼굴로 유미의 책가방을 덥석 들어다 주곤 했는데.


유미는 모른 척한다.


그동안 박용준에게 경계색을 너무 보여 주었나?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겠다. 게다가 나도 모르는 새 지완과 만났다니.


너도 역시 별수 없는 녀석이구나.


하지만 너 같은 잔챙이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구나.


다른 물로 가서 놀다가 좀 자라면 오던지.

 

유미가 강의하는 예술경영이라는 과목엔 스무 명의 대학원생들이 청강하고 있다.


십분 전에 유미가 강의실에 자리 잡자 남학생 하나가 캔 주스 하나를 건넸다.


유미는 웃으며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용준은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유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열어 보니 문자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좋으세요?’

 

코앞의 박용준이 보낸 거였다.


용준의 대시에 지완을 방패로 삼은 유미에 대한 섭섭함의 표현일까?


유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폴더를 닫고 우아한 동작으로 캔을 따서 주스를 마셨다.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박용준을 살짝 일별했다.


그는 목마른 얼굴로 유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또 휴대폰이 진동했다.


설희였다.


그동안 전화도 안 받더니….


설희가 전화를 먼저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미는 휴대폰을 들고 강의실 밖 복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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